며칠 전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 회센터를 방문했는데 적잖게 놀랐다. 평일 오후 8시 넘은 시각이었는데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비는 모습이었다. 서너 달 전까지만 해도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한 우려와 공포가 번졌던 걸 감안하면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이들의 불안이 사라진 건 아니겠지만 오염수 때문에 수산물 자체를 거부하는 국민은 상당히 줄어든 것 같다. 미국 영국 호주 연구팀들이 ‘오염수가 인체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연구 결과를 사이언스 등 권위 있는 국제학술지에 잇따라 게재하면서 팩트에 대한 믿음이 축적된 결과일 것이다. ‘위험도가 국제 기준치 이하’라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발표에 의구심을 제기하던 야당의 주장도 힘을 잃고 있다. 수산시장의 활기찬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 사회가 오염수 트라우마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괴담이 힘을 발휘하는 분야도 적지 않다. ‘인간 광우병’으로 불리는 ‘변종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vCJD)’에 대한 과도한 우려 때문에 생긴 혈액관리 규제가 대표적이다.
정부 규정상 3개월 이상(1997년 이후) 또는 1개월 이상(1980∼1996년) 영국에 체류한 경우 국내에서 헌혈할 수 없다. 프랑스 등 유럽 국가에서 도합 5년 이상 머문 사람도 마찬가지다. 영국 유학생이나 장기 여행객 중 상당수는 평생 국내에서 헌혈할 수 없는 셈이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는 손흥민 황희찬뿐 아니라 과거에 뛴 박지성 기성용도 마찬가지다.
과도한 규제의 피해는 병자들이 오롯이 감내하고 있다. 혈액 부족으로 인한 필수의료 현장의 어려움은 만성화되는 모습이다. 특히 혈액 규제로 혈액제제인 면역글로불린이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이 때문에 소아 가와사키병, 이식 후 면역결핍 등 소아·중증 환자를 위한 필수의약품 재고가 바닥날 위기다. 중증 환자들이 많은 서울대병원은 치료 중단까지 걱정할 때가 많다고 한다.
국내외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헌혈에 의한 광우병 전파 위험은 사실상 사라졌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호주와 영국 연구진에 따르면 영국 거주자의 혈액을 수혈받았을 때 vCJD에 걸릴 가능성은 14억5000만분의 1이다. 미국 호주 홍콩 등은 혈액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지난해부터 관련 규정을 삭제하거나 완화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혈액관리 당국은 광우병 논란 재연 우려에 규제 완화에 적극 나서지 못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당시 각종 괴담이 나도는 걸 경험한 국민 중 상당수는 이제 스스로 팩트를 찾아 판단하려고 한다. 내년 4월 총선까지 ‘후쿠시마 오염수 이슈’를 끌고 가려던 야당의 태도가 달라진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15년 전 광우병 사태에 대한 아픈 기억 때문에 필수의료 현장의 붕괴를 방치할 순 없다. 헌혈 규정에 대해서도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기’보다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국민들을 설득하는 용기가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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