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잔혹한 이반’ ‘이반 뇌제’로 불린 이반 4세를 칭송하곤 했다. 이반 4세는 말년에 아들을 몽둥이로 살해할 만큼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은 폭군이지만 시베리아로 영토를 넓히고 전제왕권을 확립한 러시아 최초의 차르. 스탈린은 그의 공포정치에 특히 주목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반 뇌제는 보야르(특권 귀족)를 너무 적게 죽였다. 그들을 전부 죽였어야 한다. 그랬다면 통합되고 강력한 러시아를 더 일찍 만들었을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내년 3월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대선 출마 요청에 화답하는 형식이었다. 그로선 다섯 번째 출마다. 최근 여론조사 지지도가 78.5%나 되는 상황에서 선거는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다. 71세인 그는 2020년 개헌으로 두 차례 더 6년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내년 5선에 이어 2030년 6선까지 성공하면 84세까지 집권할 수 있다. 30년 가까이 권력을 유지한 ‘20세기 차르’ 스탈린을 능가하는 ‘21세기 차르’로 최장수 크렘린궁 지도자 자리를 예약한 셈이다.
▷푸틴은 안팎의 분쟁과 위기로 막강 권력을 키웠다. 소련 붕괴 이후 술통에 빠져 자기 몸조차 가누지 못하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눈에 든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의 야심가 푸틴은 1999년 47세에 일약 제2인자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해 체첸 사태 때 대규모 공습 강행으로 강한 러시아의 부활을 과시하며 이듬해 대선에서 승리했다. 2014년 우크라이나 돈바스 전쟁 와중엔 크림반도를 병합함으로써 지지도 90%로 정점을 찍기도 했다.
▷푸틴의 정치적 입지가 커갈수록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았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야당 인사에 대한 구금과 암살이 판치면서 권력자와 주변 세력이 국가 재산을 훔쳐 끼리끼리 배 불리는 도둑정치가 횡행했다. 커지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푸틴은 국민의 눈을 바깥으로 돌렸다. 영토 확장을 통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환상을 심는 전형적 독재자 수법이었다. 작년 우크라이나 침공도 자신의 종신 집권을 위한 ‘피의 꽃길’ 깔기였을 것이다.
▷푸틴은 최근 암 수술설, 초기 파킨슨병 진단설 등 건강 이상설에 시달렸다. 과거 곰과 싸우는 모습을 연출하거나 상의를 벗고 말을 타며 ‘마초 카리스마’를 뽐낸 것과 대조적이다. 푸틴의 롤 모델은 표트르 대제. 그는 우크라이나 침공도 표트르 대제의 북방전쟁에 빗대며 “빼앗는 게 아니라 되찾는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그런 푸틴을 두고선 서구화 개혁을 상징하는 표트르 대제가 아닌, 잔혹과 광기를 남기고 떠난 이반 뇌제와 겹쳐 보인다는 평가가 많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