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소리로 절규하며 우는 것은 엄청난 자산입니다.” 시인은 절규와 울음을 자산이라고 하더니 이렇게 덧붙인다. “불평하세요!/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가만히 있지 마세요./슬퍼하세요.” 고통스러우면 불평하고, 슬프면 슬퍼하라는 조언이다. 시인은 인간을 아이에, 신을 유모에 빗댄다. “유모가 하는 일은 오직 아이의 소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아이가 조금만 칭얼거려도 유모는 달려갑니다.” 그러니 신이 달려오도록 맘껏 울라는 말이다.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루미는 이렇듯 슬픔이나 고통을 억제하지 말고 밖으로 표현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인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그의 말대로라면 그래야 맞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다. 아무리 울고 기도하고 절규해도 고통과 절망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렇다면 시인의 말은 모순도 보통 모순이 아니게 된다.
그러나 시인이 인간과 신을 아이와 유모에 비유하는 것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유모의 연민을 촉발하듯, 우리의 울음이 신의 연민을 촉발한다는 은유적 의미다. “자식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아버지가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라는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처럼, 신이 우리의 비통한 울음소리를 듣고 우리 곁으로 와서 같이 울어줄 거라는 말이다. “당신의 슬픔에서 나오는 절규가/당신을 합일로 이끕니다./도움을 원하는 당신의 순수한 슬픔이/비밀의 잔입니다.” 우리의 울음이 신에게 닿는 일종의 통로가 되고, 그 통로를 통해 신이 우리에게 와서 슬픔을 같이해 준다는 거다. 그런데 시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그들, 아니 우리는 울음 속에서 신과 하나가 된다. 우리가 쫓겨나서 울면 신도 쫓겨나서 울고, 우리가 고통을 당하면 신도 고통을 당한다. 신은 우리의 울음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 울음이 곧 기도요 신의 응답인 셈이다. 루미가 울음을 자산이라고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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