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이상훈]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교훈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12일 23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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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日 총리도 자유롭지 못한 비자금 의혹
견제와 균형 사라진 정치 현실, 피해자는 국민

이상훈 도쿄 특파원
이상훈 도쿄 특파원
불과 3주 전만 해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지난달 25일 동아일보 ‘글로벌 포커스’ 지면에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 지지율 하락을 분석하는 기사를 썼을 때다. 당시 만난 일본 정치학자와 주요 신문 정치부 기자들은 “집권 자민당 파벌 정치자금 문제가 심상찮다. 후폭풍이 만만찮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그 며칠 전 도쿄지검 특수부가 자민당 관계자를 소환해 참고인 조사를 한다는 기사가 주요 언론에 등장했다.

물론 당시 취재원이나 기자 모두 비자금 의혹을 기시다 총리에게 닥친 악재 중 하나로 봤다. 하지만 파장은 상상 이상이었다. 일본 정치권의 모든 현안과 내정, 그리고 외교 논의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됐다.

일본 정치의 비자금 역사는 길다. 금권(金權)정치의 상징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는 1976년 뇌물 5억 엔을 받은 ‘록히드 사건’으로 체포됐다. 최대 정보산업 기업 리크루트가 계열사 주식을 상장 직전 정·관계 유력 인사들에게 뿌린 1988년 ‘리크루트 사건’은 내각 붕괴를 불렀다. 1955년 창당 이래 이어진 자민당 1당 독주 체제가 무너진 것도, 일본 특유의 중선거구제가 폐지되고 정치자금 관련법이 엄격해진 것도 이때부터다.

자민당 비자금 의혹은 후원금 모금 행사에서 할당액 이상을 모은 의원들에게 초과분을 돌려줘 비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 핵심이다. 기시다 총리는 자민당 최대 파벌 아베파 간부를 내각에서 손절(損切)하는 정도로 이 사태를 해결하려 하지만 자신이 회장을 맡았던 기시다파도 비자금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와 수사는 생물(生物)’이라는 격언은 국경을 초월한다. 자민당에서는 총리 퇴진 이후를 상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개적으로 나오고 있다.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시계(視界) 제로(0) 상황이다.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을 보면서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동서고금의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강경 보수가 절대 1강(强) 자리에서 20년 넘게 사회 우경화를 이끌면서 민주주의 핵심 원칙인 견제와 균형은 약해진 지 오래다. 아베 전 총리가 자기 입맛에 맞는 인물을 검찰총장에 임명하기 위해 검찰 정년을 연장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려다 해당 인물의 도박 스캔들로 실패한 것이 3년 전이다. 30년 만의 대표 온건파 출신으로 취임 초 기대를 모았던 기시다 총리는 정책은 물론 인사에서조차 강경파 눈치를 보며 ‘적재적소’ 대신 ‘파벌 배분’으로 일관했다.

한국 사회에 이른바 국민정서법이 있다면 일본에는 ‘구키(공기·空氣)를 읽는다’는 특유의 사회 분위기가 있다. 자민당 장기 독주 체제에서 보수 강경파에 쓴소리하며 맞선다는 건 눈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 폐단이 쌓여 제2의 록히드 사건, 21세기판 리크루트 사건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한국 정치가 일본 정치보다 낫다며 자평해 왔다. 민주화 이후 5년 또는 10년 주기로 정권이 교체되며 일부 부조리를 털어낸 이제까지 역사는 그런 평가에 합당하다. 하지만 정권 안팎의 경고음에도 민심과 동떨어진 집권 여당, 당 대표가 위증 교사 및 개발 특혜 의혹 피고인인데도 반성의 기미가 없는 야당은 최악의 신뢰도와 형편없는 정치력을 보여주고 있다. 상대는 무조건 박살내야 하는 대상이며 내 편만 옳다고 응원하는 팬덤 정치 앞에서 견제와 균형은 길을 잃었다. 1명당 1억 원 안팎의 비자금 조성 의혹에 바람 앞 등불 신세가 된 일본 정치를 운동 경기 보듯 관전하기에는 한국 정치 현실이 위태롭다. 그 피해는 결국 국민이 짊어질 수밖에 없어서 더 그렇다.
#기시다#日#비자금#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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