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겨울밤 기다려지게 하는 라클레트[정기범의 본 아페티]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13일 23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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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범 작가·프랑스 파리 거주
정기범 작가·프랑스 파리 거주
밤이 낮보다 길어지는 동짓날이 다가온다. 음습한 프랑스의 겨울이 시작되면서 가장 기다려지는 음식이 라클레트(Raclette)다. ‘긁어내다’라는 의미를 지닌 프랑스어 ‘라클레(Racler)’에서 유래했다. 이 음식의 주재료인 치즈는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만 생산되는 제철 음식이다.

라클레트는 스위스의 산간 지역인 발레주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나 또 다른 산간 지역인 사부아 지방과 프랑슈콩테, 오베르뉴 지역에서도 즐겨 먹는다. 본래 12월의 크리스마스나 2월 스키 방학 때 스키장이나 별장에서 즐기는 음식이긴 하나, 파리지앵들은 집에 대부분 라클레트 기계 하나쯤은 갖고 있어서 주말에 만들어 먹곤 한다. 애초 산간 지역에서 유래한 이유도 산에서 키우는 젖소 우유로 만든 치즈와 오래 보관 가능한 샤퀴트리, 감자 등 보관성 좋은 재료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서민적인 음식이어서였다.

간단한 재료로 집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더 맛있게 먹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 있다. 치즈는 저온 살균 치즈로 스위스의 발레 지역에서 생산해 지리적 표시 AOP 인증을 받고 최소 8주 이상 숙성한 라클레트용 치즈를 사용한다. 프랑스에서 생산하는 몽도르(Mont d’Or), 블뢰 드 젝스(Bleu de Gex), 모르비에(Morbier)를 사도 충분히 훌륭하다. 감자는 프랑스에서 생산된 아망딘이나 샤를로트 품종을 고른다. 이 두 품종은 전 세계 3000여 종의 감자 중 삶았을 때 단단하면서 부드러운 식감으로 치즈와 가장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라클레트는 준비 과정이 간단하다. 감자만 삶으면 되고, 구입하기 쉬운 나머지 재료는 접시에 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 다음 라클레트 기계를 켜고 작은 삽처럼 생긴 철판 위에 여러 종류의 치즈를 번갈아 하나씩 올려놓고 가열해서 녹인 뒤 삶은 감자 위에 올려 먹는다. 이때 샐러드나 건조 햄 종류인 샤퀴트리,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의 오이를 식초에 절인 코르니숑을 곁들여 먹으면 느끼하지 않게 먹을 수 있다. 녹색 채소를 함께 섭취하니 겨울철 부족한 비타민을 보충할 수 있어 영양면에서도 훌륭하다.

파리 레스토랑 중 라클레트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 몇 있다. 외곽이지만 지하철로 갈 수 있는 셰 모닉스(Chez Monix)는 산장. 스키장의 캐빈을 고스란히 옮겨놓아 샤모니 산장에 간 듯한 느낌이 든다. 오페라 지역의 그랑 불바르 거리에서 가까운 몽블뢰는 치즈 장인 피에르 게가 엄선한 질 높은 치즈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치즈와 감자는 무한 리필이다.

보통 가족, 친구 4∼6명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위의 재료를 나누면서, 작은 삽처럼 생긴 철판 위에서 녹인 치즈를 자신의 속도에 맞춰 먹는 음식이어서 라클레트를 함께 먹자는 의미는 작은 파티와 동의어로 쓰인다. 밖에서 놀고 일하고 하루를 보낸 후 추운 날에 함께 즐기기에 이보다 완벽한 식사는 없다. 거기에 사부아 지역이나 론 지역의 생 조제프(Saint Joseph) 화이트와인 한 잔이면 완벽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지겹게 내리는 파리의 겨울비는 미치도록 싫지만, 라클레트를 생각하면 겨울이 기다려진다.

#파리#겨울밤#라클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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