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에는 떠난다[공간의 재발견/정성갑]

열두 달로 돌아가는 1년. 희망으로 부풀어 오르는 달이 있는가 하면 무겁게 가라앉는 달도 있다. 12월은 내게 우울하고 힘든 달이다. 그 이유를 나는 안다. 12월은 일적으로 무척 불투명한 달이다. 일이 꼭 많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느낌표로 딱 꿰어지지 않고 물음표로 둥둥 떠다니는 것들이 많으면 불안하고 소심해진다. 머리가 지끈 무거워지고 빨리 새해가 밝아 잡념 없이 달리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올 한 해 잘한 일도 있고, 축하할 성취도 있고, 내년을 위한 계획들도 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인 거다. 어제의 일보다는 내일의 일에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사람.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우울한 채로 12월을 버티듯 하고, 새해의 첫날까지 무기력하게 보내면서 조금씩 생각을 바꿔 먹었다. 12월엔 떠나자. 잠시라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조건 떠나자. 그렇게 3박 4일을 경주에서 보냈다. ‘히어리’라는 좋아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좋아하는 사장님 내외와 김장을 하고, 삼시 세끼를 함께 먹고, 삶은 문어에 경주 곡주를 곁들이고, 자전거를 타고 들판을 달려 막걸리를 받아왔다. 숙소 근처에 있는 부처골로 올라가 남산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석불도 만났다. 불곡여래좌상. 보물 제198호. 눈두덩과 입가에 동글동글 그리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석불은 처음 봤다.

산에서 보낸 시간은 할 만했다. 성큼성큼 잰걸음으로 산을 타는 바깥 사장님을 먼저 보내고 천천히 내 호흡으로 걷다 보니 머리가 맑아지는 게 느껴졌다. 숲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가슴도 열렸다. 바람에 먼지 날아가듯 이런저런 잡념이 시원하게 풀어졌다. 휴대전화를 꺼내 나에게 보내는 카톡 창을 열고 당장의 심경을 계속 적어 나갔다. 영감이 뭐 별건가. 잊어버릴세라 조급하게 적어 나가는 순간이 달았다. 약수를 마시는 것처럼. 대지는 겨울인데 대숲은 봄이었고 공기는 딱 기분 좋게 차가웠다. 저 높이 파란 하늘을 보며 걸으니 잠시나마 담대한 가슴의 소유자가 된 것 같았다. 걱정과 불안 대신 자족으로 충만한. 그곳에 있는 동안 나는 2024년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떠나왔다는 사실이 뭉근하게 행복할 뿐이었다. 오늘만 산다는 것이 꽤 만족스러웠다.

마지막 날 찾아간 옥룡암도 잊히지 않는다. 빨간 단풍잎이 융단처럼 수북하게 쌓인 암자. 계곡물만 조용히 흐르고 경내는 작은 인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스님의 솜씨인지 자그마한 돌부처 머리 위에는 뜨개 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유독 깨진 면이 많은 아담한 크기의 석탑도 푸근하고 정겨웠다.

내년은 또 도전일 거다. 매년 그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돌아오는 기차 안, 이런저런 상념 끝에 가장 중요한 계획 한 가지를 덧붙였다. 내년에도 12월에는 떠난다. 새해는 생각하지 않는다. 살아내는 동안 이루고 즐거웠던 일만 계속 음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