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은 어떻게 해서 봄을 알아차릴까? 식물의 씨앗이 봄을 느끼기 위한 조건은 겨울 추위다. 겨울의 낮은 기온을 경험한 씨앗만이 봄의 따뜻함을 느끼고 싹을 틔운다.’
―이나가키 히데히로 ‘전략가, 잡초’ 중
식물은 온몸으로 시간을 잰다. 봄이나 가을이나 기온은 엇비슷하지만 씨앗이 두 계절을 혼동하지 않는 건 긴 겨울이 있기 때문이다. 추위 끝에 찾아온 따뜻함이 봄기운이라는 걸 씨앗은 안다. 기껏 흙을 뚫고 나왔는데 키 큰 식물에 가려 해를 보지 못하면 낭패다. 그래서 씨앗은 가시광선의 빨간빛이 닿기를 기다린다. 빨간빛이 지표까지 다다랐다는 건 자기보다 한발 앞서 잎을 드리운 식물이 없다는 뜻이다. 달력이 없어도 필 때와 질 때를 정확히 아는 것, 그건 식물이 계절 변화를 온몸으로 읽어내는 덕이다.
식물의 시간이 엉키고 있다. 올봄 갖가지 봄꽃이 동시에 개화를 하더니, 가을엔 은행나무가 초록 잎을 땅에 떨궜다. 이번 겨울은 사람인 나도 좀 헷갈린다. 낮 기온이 20도까지 오르고 폭우가 쏟아지는 이 계절을 겨울이라 불러도 될지… 아니나 다를까 벚꽃, 개나리 인증샷이 올라온다.
기상청은 ‘일평균 기온이 5도 밑으로 떨어졌을 때’를 겨울이라고 정의한다. 이 기준대로면 지난달 말은 분명 겨울이었다. 극지에서 내려온 찬 공기에 한낮에도 수은주는 영하에 머물렀고, 긴 패딩을 입고 있어도 몸이 떨렸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날이 풀리더니 9일엔 13도에 육박했다. 봄 중에도 늦봄 같은 따뜻함이다.
지난 주말 다시 강추위가 찾아왔다. 이번에도 극지 찬 공기가 원인이란다. 그러니까 이제는 북극 한파가 가세해야 비로소 겨울다워진다는 얘기다. 섣불리 꽃망울을 터뜨린 봄꽃들은 어떻게 되려나…. 온몸으로 시간을 터득한 식물도 착각할 정도로 계절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