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카드와 레드카드의 중간 단계인 ‘오렌지카드’가 이르면 내년부터 축구 경기에 등장한다. 국제축구평의회(IFAB)는 지난달 28일 영국 런던에서 연례 업무회의를 열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등 ‘엘리트 리그’에 오렌지카드를 시범 도입하기로 뜻을 모았다. IFAB는 내년 3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열리는 총회를 통해 오렌지카드 시범 도입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
●일시 퇴장, 럭비 핸드볼 등 이미 도입
오렌지카드는 옐로카드로 그치기엔 반칙이 너무 심하고 그렇다고 레드카드를 꺼내 들기엔 다소 애매한 반칙을 한 선수에게 일시적인 퇴장을 명령하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10분간 퇴장이 유력하다. 옐로-레드카드 시스템을 도입한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이전에도 축구에는 경고와 퇴장이 있었지만 일시 퇴장 제도를 도입하기로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럭비, 아이스하키, 핸드볼 등은 이미 일시 퇴장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다만 옐로-레드카드와 달리 오렌지카드는 심판이 실제로 오렌지색 카드를 꺼내는 대신에 전광판을 통해 일시 퇴장 사실을 알리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언론에서 이 제도를 오렌지카드라고 부르는 사이 IFAB는 ‘신 빈(sin bin)’이라는 표현을 썼다. 신 빈은 일시 퇴장을 당한 선수가 머무는 장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아이스하키에선 이를 ‘페널티박스’라고 부른다. 선수가 신 빈에 머무는 동안엔 상대팀보다 적은 수로 경기를 치러야 한다.
IFAB는 축구 규칙과 규정을 정하는 기구다. 19세기 후반 ‘축구 종가’ 영국에서는 지역마다 규칙이 달라 문제가 되곤 했다. 이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축구협회는 1886년 IFAB를 만들어 규칙을 통일하기로 했다. 1913년에는 국제축구연맹(FIFA)도 IFAB 회원으로 가입했다. 1904년 설립된 FIFA는 국가별 축구협회와 대륙별 연맹 관리까지 맡고 있지만 축구 규칙 개정은 여전히 IFAB 몫이다.
IFAB가 규칙을 개정하기 전에 프로 리그 등을 테스트 베드로 삼는 건 드물지 않은 일이다. 지난해 카타르 월드컵을 앞두고 대회 참가국 선수 엔트리를 23명에서 26명으로 늘리기로 결정하기 전에도 유럽 리그에서 테스트를 거쳤다. 오렌지카드 역시 EPL 등에서 효과가 확인되면 공식 규칙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오렌지카드가 미국에서 먼저 선보일 수도 있다. 스포츠 전문 매체 ‘애슬레틱’은 “미국프로축구 메이저리그사커(MLS)가 다음 시즌에 일시 퇴장 제도를 가장 먼저 도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MLS는 유럽 리그가 2023∼2024시즌 일정을 한창 진행하고 있을 내년 2월경 2024시즌을 개막한다.
●“전략적 반칙 막기 위해 필요”
축구 경기를 보다 보면 수비수가 실점 위기에서 옐로카드를 감수하고 반칙을 저지르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IFAB는 이런 플레이를 ‘전략적 반칙’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런 플레이가 축구의 재미를 떨어뜨린다고 판단했다. IFAB 이사이기도 한 마크 불링엄 잉글랜드축구협회장은 “결정적인 역습 상황이 전략적 반칙으로 끊기는 것을 볼 때 팬들은 좌절감을 느낀다. 우리는 그것이 경기를 망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런 상황에 대한 조치가 옐로카드로 충분한지를 묻게 된다”고 오렌지카드 도입 검토 이유를 설명했다.
IFAB는 2021년 7월 이탈리아와 잉글랜드의 유럽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을 대표 사례로 꼽았다. 1-1이던 후반 추가시간 이탈리아 수비수 조르조 키엘리니가 뒤 공간을 돌아 침투하려던 잉글랜드 공격수 부카요 사카의 유니폼을 잡아당겨 넘어뜨려 옐로카드를 받았다. 이때 이탈리아 수비라인이 뚫렸다면 잉글랜드가 득점하며 경기에서 이겼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는 승부차기 끝에 이탈리아가 우승했다. 그러면서 이탈리아가 옐로카드와 우승을 맞바꿨다는 말까지 나왔다.
●판정에 대한 항의 감소 효과 확인
오렌지카드 도입은 심판 판정에 대한 항의를 줄이려는 목적도 있다. 지난달 EPL 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대한 선수들의 항의는 모두 347건으로 지난 시즌 같은 기간(165건)의 2배 이상으로 늘었다. IFAB는 럭비나 배구처럼 각 팀 주장만 심판 판정에 항의할 수 있게 하는 제도 도입도 검토 중이다.
루카스 브루드 IFAB 사무국장은 “옐로카드를 별로 걱정하지 않는 선수들이 (오렌지카드를 받아) 경기 시간의 10분의 1가량을 그라운드 밖에서 보내게 된다면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잉글랜드축구협회에서 2017∼2018시즌부터 두 시즌 동안 유소년, 아마추어, 장애인 리그 등에서 10분간 퇴장 제도를 시범 도입한 뒤로 판정에 대한 항의가 38% 줄었다는 통계가 있다.
항의만 줄어든 게 아니라 전체적인 만족도도 높았다. 2년간 31개 리그를 골라 10분간 퇴장 제도를 시범 운영한 뒤 설문을 진행한 결과 선수의 72%, 감독·코치의 77%, 심판의 84%가 제도 유지를 원했다. 잉글랜드축구협회는 2019∼2020시즌부터 모든 아마추어 리그에 일시 퇴장 제도를 적용하도록 권했다.
옐로카드가 갈수록 늘어나는 상황에서 반칙 수위에 맞게 세밀한 잣대를 들이댈 필요도 있다. 이번 시즌 EPL에서 나온 옐로카드 수는 경기당 평균 약 4.5장이다. 1992∼1993시즌 리그 출범 이후 경기당 평균 옐로카드가 4장을 넘은 건 처음이다.
●“수비 축구, 선수 부상 늘어날 것” 우려도
오렌지카드가 수면으로 떠오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제롬 샹파뉴 전 FIFA 국제국장은 2014년 회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오렌지카드 도입을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다. 당시엔 이 공약이 별로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영국 가디언은 “이미 반칙에 대해 프리킥, 페널티킥, 경고, 퇴장 등 네 가지 처벌제도가 있는 만큼 5번째 옵션은 필요하지 않다”고 평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IFAB가 직접 움직이고 있는 만큼 분위기가 다르다.
오렌지카드 도입에 앞서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일단 부상 위험에 대한 우려가 크다. 고강도의 육체 활동을 하다가 10분간 퇴장으로 짧은 휴식을 취한 뒤 다시 그라운드에 들어갈 경우 부상 우려가 크다는 지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경기가 일시 중단되는 비디오 판독 시스템(VAR) 도입 이후 선수들의 햄스트링 부상이 늘었다는 목소리도 있다.
오렌지카드가 경기 흐름을 느려지게 만들 것이라는 걱정도 나왔다. 첼시의 수비수였던 존 테리는 “(선수 한 명이 일시 퇴장당해) 10명이 되는 팀은 수비 구역에만 들어가 있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경기를 보는 모든 사람은 지루해질 것이다”라고 했다. 아스널 출신 축구 칼럼니스트 폴 머슨도 “누군가를 10분간 퇴장시킨다는 건 축구라는 경기를 죽이는 일이다. 선수들은 시간을 끌기 위해 스로인을 하고 골킥을 차며 최악의 10분을 보낼 것이다. 절대적인 시간 낭비”라고 혹평했다.
오렌지카드를 기존 규칙과 어떻게 접목해야 할지도 고민거리다. 현재 축구 규칙은 한 팀에서 5명 이상이 퇴장당할 경우 몰수패를 선언하도록 돼 있다. 한 팀에서 이미 4명이 퇴장당한 상태에서 1명이 추가로 오렌지카드를 받을 경우 경기를 계속할 것인지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또 경기 종료 3분을 남기고 오렌지카드를 받았을 때 다음 경기에 남은 퇴장시간을 적용해야 하는지, 한 경기에 오렌지카드를 두 번 받으면 몇 분간 퇴장을 적용해야 하는지 등도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