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에 두 권씩 다이어리를 써온 지도 한참이다. 책장 한편에는 벌써 서른 권이 넘는 세월이 빼곡히 꽂혀 있다. 눈 덮인 주말 아침, 커피 한 잔과 함께 책상 앞에 앉는다. ‘2023.07∼12’ 꾹꾹 눌러쓴 라벨을 다이어리 귀퉁이에 붙이자 또 이렇게 한 해가 간다는 것이 조금은 실감이 난다. 남은 기간 ‘고작’ 2주. 몇 장 남지 않은 페이지를 넘겨 목록을 하나 만든다. 제목은 ‘셀프 송년회’.
한 계절을 정신없이 보냈다. 임무 하나를 완수하고 나면 그다음 임무가 있었고 또 그다음이 있었다. 며칠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마침내 종지부를 찍은 날, 곧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향한 곳은 침대가 아닌 영화관이었다. 달콤한 팝콘 향, 전광판 가득 부산스러운 신작들. 생맥주 한 잔을 사 들고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영화는 별로였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영화가 아닌 ‘영화관’이, 이 체험이 그리웠다.
그 귀갓길, 문득 부아가 났다. 고작 이게, 왜 그립기까지 했는지. 나가기 싫은 모임은 나가고 의미 없는 ‘쇼츠’로 시간은 죽이면서 지척의 영화관은 왜 못 왔는지. 그래서 올해 남은 기간 동안만이라도 벼락치기 하듯 하고 싶었던 일들을 채워 넣기로 한 것이다. ‘매주 혼자 영화관 가기’를 1번으로 대중없는 소소한 욕심들이 목록을 채운다. 전반적으로 스스로에게 소홀했던 해였지만 이렇게나마 좋아하는 것들로 마무리를 하면 이 헛헛함이 조금은 메워질 테니까.
이어 책장을 뒤적여 다이어리 몇 권을 집어 든다. 매년 이맘쯤의 의식 같은 것이다. 과거의 나로부터 지금의 내게 필요한 말을 구한다. 가령, 미국 교환학생 시절의 일기는 지금 봐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친구’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어 유치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다. 언어를 배우러 간 입장에서 교우 관계는 단순한 여가 이상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어울려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 경험이었다.
그 뒤 의식적으로 ‘밖에서 보기’를 연습한다. 지금은 세상의 전부 같지만 사실 대부분의 것들은 돌아보면 다 별게 아니라는 것. 이 시절의 일기는 그 감각을 불러온다. 그 외 업무가 맞지 않아 힘들었던 시절의 일기부터 매일 가족의 건강을 기도하며 잠 못 들던 시절의 일기까지. 지난 과오와 수치, 불행을 복기하다 보면 결국 남는 감정은 ‘감사’, 이 하나다.
언젠가 썼던 일기에 대한 일기. ‘한 해간의 다이어리 농사는 라벨을 붙이는 작업으로 갈무리한다. 시간이 지나 다시 열어 보면 잘 빚어진 담금주처럼 새로운 맛과 향을 품고 있다. 그때는 썼던 것이 꼭 쓰지만은 않고, 그때는 달았던 것이 꼭 달지만도 않다. 묵묵히 내 몫의 하루를 빚는다. 그거면 된다.’ 스스로 작은 욕심들은 돌보되, 큰 줄기로의 겸허함과 감사는 잊지 않는 것. 다가오는 새해, 어쩌면 다가올 모든 날을 관통하는 다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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