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도 현실이다[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326〉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19일 23시 24분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작가 이병주가 역사와 신화를 대조시키며 했던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은 역사와 신화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달빛은 결국 태양빛을 반사한 것이 아닌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의 탄생 신화는 좋은 예다. ‘삼국유사’는 신화를 이렇게 전한다. 어떤 부잣집에 딸이 있었는데 밤마다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와서 자고 갔다. 아버지는 딸의 말을 듣고 실을 꿴 바늘을 남자의 옷에 꽂아두라고 일렀고, 날이 밝아 그 실이 간 곳을 찾아가 보니 지렁이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그가 견훤이다. ‘삼국사기’는 견훤이 상주 가은현에서 태어났다고 하고, ‘삼국유사’는 광주 북촌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하고많은 존재 중에 왜 하필 지렁이였을까. 토룡(土龍)이라고 일컬어지기는 해도, 지렁이는 동양에서 신성시하는 용과 동급이 아니다. 그리고 견훤이 지렁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사실일 수 없다. 그런데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에 따르면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라 은유적으로 현실을 비추는 시(詩)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때로는 왕건의 군대를 격파할 정도로 막강했지만 결국에는 졌다. 역사는 패자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후백제가 멸망하고 200∼300년이 지나 쓰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견훤을 깎아내리면 깎아내렸지 영웅시하거나 신성시할 리가 없었다. 그것이 정치적, 심리적 현실이었다. 견훤은 전투에서도 패자였고 신화에서도 패자였다. 탄생 신화도 그렇지만, 그를 수호신으로 섬기는 경북 상주 청계마을의 초라하기 그지없는 사당에서 패자의 상처와 비애가 느껴지는 이유다.

달빛이 햇빛을 반사하듯 신화는 현실을 반사한다. 햇빛도 현실이고 달빛도 현실이다. 그런데 월광에 물든 신화가 태양에 바랜 역사보다 더 깊은 진실을 얘기할 때가 있다. 역사가 담아내지 못하는 내면적 진실을 은유적인 이야기로 담아내기 때문이다.

#작가 이병주#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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