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잊혀진 설날’이 있다. ‘작은 설’, ‘아세(亞歲)’라 불리는 오늘 우리가 맞이한 동짓날이다. 동지의 대표적인 민간 풍속은 팥죽과 관련된다. 팥죽을 쑤어 대문이나 집 안의 곳곳에 뿌리는데, 이는 팥의 붉은색이 가지는 양의 기운이 동지의 의미와 결부되어 벽사축귀(辟邪逐鬼)의 기능으로 확대된 것이다. 또 동지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고 하여 사람들은 자기 나이 수대로 새알심을 넣은 팥죽을 먹는다.
우리에겐 흔히 명절 또는 기념일 정도로 인식되는 세시풍속은 1년을 주기로 특정한 시기에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생활양식을 말한다. 우리나라 세시풍속의 절정은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까지이다. 세시풍속의 절반 이상이 이때 행해지는데, 이 시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신에 의해 새로운 시간 질서가 구축되는 때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시간대가 아니기에, 정초에 우리는 일상을 내려놓고 신을 위한 행위에 몰두한다. 마을에서는 당산신을 위해 동제(洞祭)를 지내며 가정에서는 집 안 구석구석 좌정한 가정신들을 위한 의식을 치른다. 동시에 인간에게는 다양한 금기가 부여된다. 설날을 ‘근신하여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의미로 달리 신일(愼日)이라 부르는 것도 정초를 신들의 시간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풍속은 거의 사라졌다. 인사치레로 “오늘 팥죽 먹었어?”를 건네는 정도이며, 팥죽은 잊히고 그저 1년 중 밤이 가장 긴 날로만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동지를 잃어버리기에는 너무 큰 아쉬움이 남는다.
동지는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건강과 무탈함을 예축(豫祝)하는 날이다. 동짓날 팥죽을 먹고 미리 한 살을 더 얻는 것은 새로운 시간 질서에 무사히 진입하였음을 선언하고 기정사실화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이에게 팥죽을 어떻게든 먹이려 했던 것은 자식을 지키겠다는 숭고한 사랑의 표현이다. 진입의 실패는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또 부모님 앞에 공손히 올리는 동지팥죽은 다가올 소한과 대한의 강추위에 생사의 갈림길에 설지도 모를 부모님을 향한 지극한 효심의 다른 이름이다.
동지는 지난해의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해의 삶의 태도를 가다듬는 날이기도 하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은 형은 동생을 더욱 의젓하게 대하리라 마음먹고 아버지는 가정을 넉넉히 보살피리라 다짐한다. 또 이미 마음으로는 새해가 시작되었으니 설날과 정초의 의미를 되새기며 스스로 행동거지를 단속한다. 새로운 시간 질서를 경건히 맞을 준비를 시작하는 것이다.
오늘은 누구에게는 크리스마스 연휴를 앞둔 마음 느긋한 날일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불금의 송년회’가 기대되는 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짓날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먼저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의 안부를 물으면 어떨까. 그들의 무탈과 안녕을 기원하면 좋을 것이다. 이것으로 이미 신중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할 준비가 끝난 것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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