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어제 본회의를 열어 656조6000억 원의 내년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여야의 극한 대치로 인해 이달 2일까지인 법정시한을 19일 넘겨 지각 처리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자신들 뜻대로 정부안을 수정해 단독 처리할 뜻을 밝히자, 국민의힘과 정부가 급하게 협상에 나서면서 지난해의 22일 최장 지각 처리 기록을 깨는 불명예는 피했다. 하지만 3년 연속 법정 시한을 어겼고, 그 과정에서 어떤 타협이 이뤄졌는지 국민은 알 수 없는 ‘블랙박스’식 밀실 합의가 재연됐다.
통과된 내년 예산안은 정부안을 4조2000억 원 깎은 대신 여야가 요구한 3조9000억 원을 늘려 전체적으로 3000억 원 감액됐다. 정부가 나눠 먹기 예산 배정을 바로잡겠다며 올해보다 5조2000억 원 줄인 연구개발(R&D) 예산은 여야 합의로 6000억 원을 증액했다. 여야의 타협으로 민주당이 깎으려던 정부 원자력 예산 1814억 원, 정부가 전액 삭감했던 ‘이재명 표’ 지역화폐 예산 3000억 원이 동시에 살아나고, 새만금 예산 3000억 원이 증액됐다.
내년 예산 증가율은 올해 본예산 대비 2.8%로 관련 통계가 정비된 2005년 이후 최저다. 코로나19 등을 이유로 급증하던 예산 규모, 나랏빚 증가에 어느 정도 제동은 걸린 셈이다. 하지만 막바지 협상에서 여야가 국회법상 근거가 없고, 회의록도 남기지 않는 소(小)소위원회를 만들어 주고받기 흥정을 하는 구태가 되풀이된 게 문제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의 한 해 나라 살림이 극소수 여야 지도부와 공무원만 모인 밀실에서 최종 결정됐다.
이 과정에서 여야 전·현직 대표, 원내대표, 정책위의장을 비롯한 실세 의원들의 지역구 사업 예산이 수억∼수십억 원씩 새로 반영되거나 늘었다고 한다. 한쪽 주장만 일방적으로 관철할 수 없어 주고받기 타협이 불가피하다 해도, 이런 협상을 기회로 삼아 제 지역구를 챙기려고 ‘쪽지예산’ ‘카톡예산’을 끼워 넣는 것은 뿌리 뽑아야 할 관행이다.
거의 매년 국회의 예산안 처리가 늦어지고, 그 과정에서 깜깜이 뒷거래가 이뤄지는데도 정치권은 개선하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소수만 참여하는 긴밀한 협상이 불가피하다면 회의록이라도 만들어 투명하게 공개하는 걸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무슨 근거, 어떤 이유로 수백수천억 원의 혈세가 여야 협상 테이블에서 오갔는지 국민은 알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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