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원장 동지께서 ‘달걀을 사상으로 채우면 바위도 깰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우리는 그러한 투철한 사상으로 아시안게임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북한 ‘역도 영웅’ 엄윤철(32)은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 56kg급에서 세계신기록(298kg)으로 우승한 뒤 말했다. 여기서 ‘위원장’은 물론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었다. 엄윤철은 2012 런던 올림픽 때도 이 체급 금메달을 차지했던 선수다.
엄윤철을 다시 만난 건 2년 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였다. 엄윤철은 올림픽 2연패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은메달이었다. 북한 선수 가운데 가장 확실한 금메달 후보로 꼽히던 엄윤철이 목표 달성에 실패하자 최룡해 북한 국가체육지도위원장이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엄윤철도 “금메달을 못 땄으니 영웅이 아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엄윤철의 말을 통역하던 외국인 자원봉사자는 “북한에서는 시계가 거꾸로 가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북한 ‘체조 영웅’ 리세광(38)이 이 자원봉사자의 평가를 또 한 번 입증했다. 리세광은 리우 올림픽 남자 뜀틀 1위를 차지한 뒤 “우리의 제일 큰 힘은 정신력이다. 정신력 덕분에 오늘의 금메달이 이뤄진 것”이라며 “우리 군대와 인민들에게 크나큰 승리를 안겨주고, 경애하는 김정은 최고사령관 동지께 승리의 보고, 영광의 보고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맞다. 스포츠 세계에서 정신력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면 북한이 우승을 휩쓸 것이다. 북한 ‘노동신문’은 올해 2월 28일에도 ‘한계가 없는 힘-정신력’이라는 기사를 통해 ‘소총에도 사상을 만장약(滿裝藥)하면 그 어떤 현대적인 무기보다 더 큰 위력을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달걀로 바위를 못 깨는 건 정신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과학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이 ‘엘리트 체육’ 강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던 것도 한국 스포츠 과학이 세계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생활 스포츠 저변이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은 일본도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을 본떠 일본국립스포츠과학센터(JISS)를 만든 뒤에야 엘리트 체육 강국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 대한체육회가 내년 파리 올림픽을 재도약 무대로 만들고 싶었다면 ‘과학적 훈련법’과 ‘과학적 전략’부터 고민하는 게 옳은 일이었다.
그런데 대한체육회는 이기흥 회장이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끝난 뒤 공언했던 대로, ‘정신력을 강화하겠다’며 선수들을 ‘해병대 캠프’로 보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마저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비판했지만 체육회는 18일부터 2박 3일 동안 ‘원 팀 코리아’ 행사를 강행했다.
이 회장이 북한 체육위원장이라면 파리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 누군가는 “위원장 동지 덕분에…”로 시작하는 감사 인사를 남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저런 말을 남기는 한국 대표 선수가 나온다면 “이제 한국에서도 시계가 거꾸로 가는 모양”이라는 평가가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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