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서울에서 집 한 채를 사려면 연간 소득의 15배를 쏟아부어야 한다. 올해 서울 아파트 평균 분양가는 10억 원이 넘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청년층(15∼39세)의 연간 평균소득은 2781만 원인데, 이렇게 큰돈이 어디서 나오나. 집 장만할 생각하면 결혼하고 아이 낳고 키우는 일이 막막하다.그러니 청년들 사이에서 ‘결혼 파업’이니 ‘출산 파업’이라는 말이 나온다.
일해서 번 돈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뛴 집값을 대려면 은행 대출을 받거나 부모에게 손을 벌려야 한다. 정부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매년 ‘청년 지원대책’으로 포장한 정책 대출을 쏟아내고 있다. 젊어서 낸 빚은 늙어가면서 갚아야 할 짐이다. 지난해 집이 있는 청년의 대출잔액(중앙값)은 1억4150만 원으로 중장년층(1억196만 원)과 노년층(5000만 원)보다 더 많다.
대출이 턱밑까지 차오르자, 정부가 요즘 눈독을 들이는 건 부모의 자산이다. 정부는 결혼이나 출산 전후 2년간 최대 1억 원까지 증여재산을 비과세해 주는 ‘결혼출산 증여재산 공제’ 제도를 내년부터 시행한다. 신랑과 신부가 각각 기존 자녀 증여공제 한도 5000만 원에 결혼 증여재산 공제 1억 원까지 더해 양가에서 최대 3억 원까지 비과세 증여를 받을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다 정부가 푼 정책 대출까지 받아 무섭게 뛴 집값을 감당하라는 건데, 이러다 보면 청년들을 빚의 노예로 만들고 부모 세대의 노후자산까지 위협할 수 있다.
우리보다 앞서 2015년 혼인 육아 증여자금 공제를 도입한 일본은 가계자산의 63%가 금융자산이다. 부모 세대의 자산 이전이 우리보다 수월하다. 한국 가계는 금융자산 비중이 35.6%에 불과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40세 미혼자녀 1인을 둔 가구 중 결혼 증여공제 한도 1억5000만 원 이상의 금융자산을 보유한 가구는 전체의 27%에 그쳤다. 게다가 한국에선 결혼과 출산 전후 2년 이내에 증여를 해야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자녀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한국 ‘가시고기’ 부모들의 상당수는 주어진 기간에 증여세 공제를 받기 위해 집을 내놓거나 금융회사 대출이라도 받아야 할 판이다.
결혼 증여재산 공제가 부모 세대의 노후까지 위협하는 ‘현대판 결혼 지참금’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더 정교해져야 한다. 증여 목적을 결혼 출산에서 일본처럼 육아까지 확대하고 ‘2년’이라는 증여 시점 제한도 완화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부모들이 자녀들을 결혼시키면서 급하게 증여할 돈을 마련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일본은 18∼50세 자녀에게 결혼 출산 육아 자금을 비과세 증여할 수 있도록 자녀 나이를 제한한다.
‘출산 장려’라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려면 자녀의 소득 요건과 증여재산 사용처에 제한을 둬야 불필요한 ‘부자 감세’ 논란도 없어진다. 국회예산정책처의 여론조사에서 혼인 증여공제 제도에 부정적인 응답자의 절반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은 정책과 무관하게 의사결정을 한다”고 답했다. 출산 인센티브가 안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본은 자녀들이 은행 등에 결혼 육아자금 계좌를 개설하고 증여 자금을 신탁 방식으로 관리하게 한다. 자금을 인출하면 결혼 출산 육아 목적으로 썼다는 증빙 서류를 제출해야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자녀 연소득이 1000만 엔을 넘으면 비과세 대상에서 제외된다.
한국의 증여세 최고세율(50%)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일본(55%)에 이어 2번째로 높다. 자녀 증여공제 한도(5000만 원)는 5번째로 낮다. 세금으로 집값 잡으려다 누더기 부동산 세제를 만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출산 장려를 위한 일회성 세제 지원 대책 말고 이참에 경제 상황에 맞게 증여, 상속세에 대한 근본적 개혁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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