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 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이끈 경제정책을 하나만 꼽는다면 ‘수출 주도 성장 전략’을 들 수 있다. 한국 산업의 고도화로 이어진 이 정책의 중심에는 상공부(산업통상자원부의 전신)가 있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전직 경제관료 모임인 재경회와 함께 발간한 ‘코리안 미러클’(2013년·나남)에 따르면 1964년 3월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차 일본 도쿄를 찾은 김정렴 당시 대일청구권 대표위원(훗날 대통령비서실장)이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에게 “일본처럼 수출지향 공업화를 해야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제안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로부터 두 달 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임명된 장기영은 김정렴을 상공부 차관에 발탁했다. 이후 소비재 수입품을 국산화하는 수준에 머물던 한국 경제는 수출 주도형으로 바뀌면서 매년 40%가 넘는 고도 성장을 거듭했다. 이는 장 부총리가 박 대통령으로부터 경제부처 각료 임명권을 위임받아 김정렴 등 실력 있는 테크노크라트들을 대거 기용했기에 가능했다.
박정희의 경제각료 용인술은 ‘장기적 시각’과 ‘전폭적 위임’으로 요약된다. 상공부 장관을 거친 김정렴은 9년 3개월간 비서실장으로 일하며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고, 남덕우 경제기획원 장관은 9년 3개월(재무부 장관 포함) 동안 경제정책을 총괄했다. 또 경제부처 장관은 비서실이 전문성을 검증해 추천한 인사 중 대통령이 지명하고, 차관 이하 인사는 장관에게 전적으로 위임해 부처 장악력을 보장했다.
반백 년 전 이야기를 꺼내 든 것은 내년 총선 차출을 위해 방문규 산업부 장관, 김완섭 기획재정부 2차관, 김오진 국토교통부 1차관, 박성훈 해양수산부 차관 등 주요 경제부처 장차관 4명을 임명 3∼5개월 만에 교체하기로 한 대통령실의 인식이 우려스러워서다. 방 장관의 임기 3개월은 박정희 정부 당시 남덕우 장관 재임 기간의 2.7%에 불과하다. 대통령실과 집권여당의 판단에 따라 장관 휘하의 현직 차관 3명이 총선에 한꺼번에 차출된 것도 이례적이다. 차관 이하 인사를 장관에게 일임한 박정희의 용인술과 비교된다.
내년 총선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대통령실과 여당의 다급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방 장관 교체에 대해 “국가 전체로 봤을 때는 크게 ‘데미지’라고 할 건 없다”(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라고 말하기에는 현재 산업부가 처한 상황이 엄중하다. 우리 경제는 역대급 무역적자가 이어지는 가운데 미중 갈등으로 공급망 위기를 맞고 있다. 여기에 최근 홍해에서 일어난 예멘 반군의 공격으로 수출 차질이 우려된다. 산업부 산하 공기업인 한국전력은 2021년 2분기부터 올 2분기까지 누적 적자가 47조 원에 달한다. 한전의 천문학적 적자를 해소하기 위한 전기료 인상 등 공공요금 상승 여파로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3.8%)은 6년 2개월 만에 미국(3.2%)을 앞질렀다. 이 같은 전방위 위기에 산업정책 사령탑은 사실상 공백 상태다.
최근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되면서 개발경제 시대의 주역이던 산업정책이 선진국에서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금의 1등 수출 품목인 반도체 산업은 상공부 주도로 1969년 입안된 ‘전자공업진흥법’과 ‘전자공업진흥 기본계획’에 뿌리를 두고 있다. 3개월짜리 단명 장관으로는 인공지능(AI) 산업혁명과 미중 갈등의 고차 방정식을 풀 수 있는 산업정책을 내놓을 수 없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