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관영매체의 보도를 접할 때마다 그처럼 그악스럽고 허풍스러운 표현들을 대체 어디서 찾아내는지 섬뜩함과 뻔뻔함에 혀를 내두르곤 한다. 북한처럼 국제질서의 파괴와 혼란만이 살길인 구제불능의 현상타파 국가로선 공갈과 허세 가득한 불량배 언사가 어쩌면 필수 선택지일 것이다. 겁먹은 개가 더 요란한 법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수사적 과잉을 걷어내고 보다 긴 흐름에서 살펴보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엿볼 수 있다.
작년 세밑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 결과에는 김정은의 기세등등함이 곳곳에 묻어 있다. 그는 2023년이 ‘위대한 전환의 해, 위대한 변혁의 해’였다며 으스댔다. 남북관계를 ‘전쟁 중인 두 교전국’으로 규정하고 “고압적이고 공세적인 초강경 대응”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도 지시했다. 새해 들어선 어린 딸의 볼에 입을 맞추는 모습까지 연출하며 4대 세습을 통한 권력의 공고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런 기고만장에는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고체연료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잇단 실패 끝에 쏘아올린 군사정찰위성 같은 성과를 앞세운 자신감이 깔려 있다. 그런 김정은을 두고 일부 외신은 ‘권력의 절정기’라거나 ‘놀라운 회복력’이라는 평가도 내놨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북한 주장대로 ‘자력갱생, 견인불발의 투쟁으로 이룬 경이로운 승리’일까.
2019년 북-미 간 협상 결렬로 씁쓸한 좌절을 맛본 이래 김정은은 긴 시련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당장 남측에 분풀이를 해댔지만 한미 정상과 나란히 국제무대에 섰던 호시절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갈수록 여건은 불리해졌다. 코로나19로 3년 넘게 국경을 꽁꽁 틀어막은 상태에서 달갑지 않은 미국과 한국의 정권교체를 목도해야 했다.
2021년 1월 8차 당대회 때만 해도 김정은은 새로 출범할 미국 바이든 행정부에 기대를 거는 것처럼 보였다. 남측을 향해 악담을 퍼부으면서도 “태도 여하에 따라 봄날로 돌아갈 수도 있다”며 여지를 남겼다. 미국을 향해선 “강대강, 선대선의 원칙으로 상대하겠다”며 북-미 담판을 압박했다.
하지만 새로운 ‘실용적 접근법’을 내세워 톱다운식 협상을 거부하는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실망은 커져만 갔다. 그럼에도 김정은은 머뭇거렸다. 그해 말 전원회의에서 “다사다변한 국제정세”만 거론한 채 대외정책 방향에 대해선 침묵했다. 이듬해 윤석열 정부의 출범과 한미의 대북 강경 기조는 결국 북한의 선택지를 제한했다. 달리 대안이 없는 외길, 즉 핵무력 증강과 도발만 남은 것이다.
한편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함께 선명해진 신냉전 대결 기류는 북한에 새로운 기회의 창을 열어줬다. 김정은은 2022년 말 전원회의에서 “국제관계 구도가 ‘신랭전’ 체계로 명백히 전환되고 다극화의 흐름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며 반(反)서방 진영 가담을 천명했다. 그 결과 김정은은 러시아에 구식 포탄을 제공하고 첨단무기 기술을 이전받는 거래를 텄고 러시아 방문으로 외교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었다.
정세의 변화를 재빨리 포착하고 그 기류에 올라타는 것은 약자의 숙명적 생존방식이다. 분쟁과 갈등, 불안정은 북한 같은 도발자가 노리는 도박판이다. 새해엔 한국 총선과 미국 대선도 앞두고 있다. 김정은은 “변천하는 국제정세에 맞게 미국과 서방의 패권전략에 반기를 드는 나라들과의 관계를 가일층 발전시키겠다”며 ‘반제 공동투쟁’도 내세웠다. 더욱 현란한 대외 공세를 예고한 것이다. 그에 따른 파장과 부담은 곧바로 한국이 감당해야 한다. 면밀한 경계와 기민한 대응, 특히 한 수 앞을 내다보는 유연한 전략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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