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제천에 있는 서점 ‘안녕, 책’ 식구들과 시간을 보낸다. 경신 씨와 치형 씨는 귀엽고 착하고 좋은 사람들. 언제 만나도 편안하고 따뜻하다. 이번에 또 하나 귀여운 점을 발견했는데 경신 씨는 자영업자로 오랫동안 살다 보니 다른 사람과 회의가 하고 싶어 ‘관계의 미학’이라는 동네 카페 사장님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회의를 한다고. 회의 주제는 뭐냐고 물었더니, 아침 몇 시에 일어날 것인가? 몇 시에 씻을 것인가? 하하, 세상엔 정말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다. 산만 한 덩치에 순한 미소의 치형 씨는 ‘곰신’ 같은 사람인데 본인 왈 “저는 뽀로로 계열이에요.” 무슨 말이에요? 물었더니 노는 게 제일 좋다고(뽀로로 주제가 가사). 노는 곳에는 어떻게든 안 빠지고 참석한다고. 노는 게 제일 좋은 ‘곰’이라니. 올해도 그가 행복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들과의 시간은 느긋하게 흘러간다. 일정이나 계획 같은 건 당연히 없다. 배가 고프면 먹고 모이고 싶을 때 모인다. 남쪽으로 낸 통창으로 빛이 풍년처럼 들어오는 거실에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얼마 안 가 ‘아, 안 되겠다. 한 시간만 자고 올게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한다. 환대의 방식도 귀엽다. 이번에는 ‘제천에 오셨으니 제천 얼음 딸기 맛보셔야죠?’ 하는 메모와 함께 딸기 한 박스가 식탁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또 딱 거기까지. 부러 냉장고를 채워 놓거나, 평소보다 더 열심히 청소기를 돌리거나 하는 일은 없어, 가는 우리도 마음이 편하다. 가장 좋은 건 하루가 느긋하게 흘러간다는 것. 아침 일찍 일어나 여러 가지 일을 한 것도 아닌데 하루가 길고 풍요롭고 따스하게 느껴진다. 어디 가서 눈이 즐겁고, 입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적당히 게으르고 적당히 즐거운 가운데 하루가 온전히 내 것으로 스며드는 기분이랄까.
이런 달콤함에도 유효 기간이 있긴 하다. 성격이 급하고 걱정도 많은 타입이라 돌아오는 날, 오후 6시가 넘어가기 시작하면 서울엔 언제 가나? 밤 운전 위험한데? 온갖 걱정이 들기 시작하면서 급히 떠날 채비를 하게 되는 거다. 그런 나를 보고 이 집의 12세 막둥이 하준이가 한 말. “정성갑 님, 느긋한 게 최고예요. 시간이 쫓아오면 힘들어요.” 그때부터 시작된 느긋함 예찬.
하준아, 2024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 느긋하게요 / 하준이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어? / 느긋한 어른요 / 하준이는 가 보고 싶은 나라 없어? / 느긋한 나라요. 급기야 이런 철학까지. 그래도 하준아, 너무 느긋하게만 살면 원하는 걸 못 갖지 않을까? / 아니죠. 잠도 푹 자고 느긋하게 해야 더 정신 차리고 잘하죠. 시간은 시간일 뿐이에요.
하, 비밀의 문처럼 지혜로운 말 아닌가. 마음이 급해질 때는 한 번씩 생각해야지. ‘시간이 쫓아오면 힘들어요. 시간은 시간일 뿐이에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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