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기업이 수조 원짜리 공장을 지을 장소를 찾는다고 치자. 대형 고객이 가까운 곳, 원자재를 구하기 쉬운 곳, 인건비가 싼 곳, 투자비를 줄일 수 있는 곳…. 고려해야 할 요소가 너무나 많다. 만약 투자비를 줄이는 데 방점을 찍는다면 ‘일본’만 한 곳이 없다. 대만 TSMC는 현재 일본 구마모토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공장을 짓고 있는데 총투자비용 11조2000억 원 중 4조5600억 원을 일본 정부로부터 보조받았다.
만약 한국에 공장을 짓는다면 혜택은 어느 정도일까. 작년 3월 온갖 진통 끝에 국회를 통과한 반도체 지원책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에 기초한 혜택을 뽑아 봤다. 그 효과를 반감시키는 최저한세 영향은 제외했다. 작년에 공장을 지었다면 혜택을 100% 누려 2조8000억 원을 세액공제로 돌려받을 수 있다. 올해 짓는다면 투자증가분 추가세액공제 10%가 사라져 혜택은 1조6800억 원으로 줄어든다. 만약 내년에 지으면 K칩스법 일몰로 8960억 원 세액공제밖에 없다. 4조5600억 원과 8960억 원. 너무나 큰 차이다.
미국, 대만, 유럽 주요국 등도 자국으로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각종 지원책을 내놓고 있지만 일본만큼 강력하진 않다. 한국과 일본에 똑같은 파운드리 공장을 지어 10년간 운영할 경우 일본에서 만든 제품이 한국보다 원가경쟁력을 10% 이상 가진다는 게 반도체 업계의 분석이다. 일본산 제품이 그만큼 싸지는 셈이다. 보조금이 부린 마법이다.
일본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2021년 3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반도체·디지털 산업전략 검토회의를 눈여겨봐야 한다. 경제산업성 홈페이지에 게재된 회의 요약본 첫 부분은 이렇다. “일본 반도체 산업의 재부흥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본 반도체 산업에 대한 큰 위기감을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다. 기회는 있지만, 지금부터 힘을 쏟지 않으면 힘들다.”
전체 자료를 읽어 보면 마치 반성문을 보는 것 같다. 1980년대 세계를 호령하던 일본 반도체 산업이 지금은 존재감 없이 무너졌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자료에 적힌 ‘일본의 나락’이란 소제목도 꽤 자극적이다.
일본 국회는 크게 각성한 정부를 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2021년 5월 일본의 집권 자민당 의원 100명이 모여 만든 ‘반도체전략추진의원연맹’이 핵심 축이다. 의원연맹은 “반도체를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면서 정부 정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경제산업성은 같은 해 6월 ‘반도체·디지털 산업전략’을 발표했다. 거기엔 3단계 전략이 나온다. ①일본 내 첨단 반도체 생산 기반 확보 ②차세대 반도체 기술 확보 ③반도체를 활용한 미래 산업 주도 순이다. 발표 후 3년도 안 돼 일본은 파운드리(TSMC, PSMC), D램(마이크론), 후공정(TSMC, 인텔) 분야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공장을 유치했다. 낸드플래시(키옥시아), 자동차용 반도체(르네사스), 이미지 센서(소니) 분야에선 일본 토종 기업이 힘을 쓰고 있으니 일본은 사실상 모든 종류의 반도체 생산 거점을 확보했다. 앞으로 ②, ③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한국은 ‘메모리 강국’이란 현 위치에 도취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일본이 한국 기업에도 공장 유치 제안을 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 이윤을 따라 기업이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기에 애국심만으로 붙잡기에는 한계가 있다. 10년쯤 지나면 일본이 썼던 반도체 반성문을 한국이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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