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싱크탱크 외교협회(CFR)는 4일(현지 시간) ‘2024년 예방해야 할 위협 우선순위’ 보고서를 내놨다. 이 보고서는 2008년부터 매년 500명 이상의 전·현직 관료와 외교안보 전문가들을 설문조사해 새해 미국 안보에 가장 큰 위협이 될 글로벌 분쟁을 진단해 왔다. 한 해 글로벌 정세의 흐름을 미리 살펴보는 공신력 있는 보고서로 평가받는다.
올해 보고서에선 가장 시급한 위협인 1등급(tier) 위협 8개 중 가장 중대한 위협으로 미국의 정치폭력이 꼽혔다. 보고서는 “외교정책 전문가들이 외국의 위협이 아닌 미국 내 문제를 가장 우려하는 위협으로 선정한 것은 처음”이라며 “올해 대선을 전후한 정치적 양극화의 심화가 미국 내 테러와 정치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에선 이번 대선에서 누가 승리하더라도 내전 수준의 정치적 갈등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31일 소셜미디어에 “조 바이든 대통령과 급진 좌파들이 불법 이민자에게 국경을 개방해 이들이 대선 투표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대선 승리를 위해 자신들을 위해 표를 행사할 불법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새로운 음모론이다. 미 민주주의에 치명적 오점을 남긴 ‘1·6 의사당 난입 사태’로 이어진 2020년 대선 불복에 이어 벌써부터 올해 대선 불복의 구실들을 깔아 놓고 있는 셈이다.
민주당도 2016년과 달리 이번 대선에서 패배할 경우 쉽게 물러서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91건의 형사범죄 혐의로 기소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대통령 면책특권을 둘러싼 법정다툼을 이어가며 자신의 혐의에 대한 판결을 대선 이후로 늦추려는 지연 작전을 쓰고 있다. 반면 반(反)트럼프 진영은 콜로라도와 메인에 이어 일리노이와 매사추세츠에서도 ‘1·6 의사당 난입 사태’를 일으켜 내란에 가담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참여 자격 박탈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미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가 공공종교연구소(PRRI)와 함께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미국을 구해야 한다’는 데 지지한 민주당 지지자는 13%로, 2년 전 조사(7%)보다 두 배 가까이로 늘었다. 같은 질문에 대한 공화당 지지자의 지지율은 33%에 이른다.
민주주의 본산을 자처하던 미국이 이 지경으로 흐른 것에 대해선 다양한 분석들이 나온다. 중국으로 인한 제조업 붕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양극화의 심화 등 경제적 원인, 소셜미디어와 진영 논리에 충실한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 인한 팬덤 정치의 확산, 또는 선거인단 승자독식제 등 정치체제의 한계 등이 대표적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정치 위기에 기름을 붓고 있는 것은 정치인들의 입이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임기 동안 3만573건의 허위 주장을 폈다. 정도는 덜할지 모르지만 바이든 대통령도 경제지표나 총기규제 등 핵심 정치 현안들에 대한 허위 정보를 반복해 트럼프 전 대통령과 함께 나란히 ‘올해의 피노키오’로 뽑혔다.
이성보다 믿음이 지배하는 양극화된 정치 환경에서 유력 정치인들이 퍼뜨리는 ‘가짜 뉴스’는 진실과 허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음모가 판치는 증오의 정치로 이어진다. 라스무스 닐슨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에서 “가짜 뉴스의 가장 큰 생산자는 인공지능(AI) 등 신기술이 아니라 정치 엘리트들”이라며 “정치인들이 대중에 대한 ‘가스라이팅’을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협은 정치인 자신이라는 의미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피습 사태를 맞은 한국 정치권도 새겨들어야 할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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