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배속 시청, 짬PT… 시간 쪼개쓰는 ‘분초사회’[트렌드 읽기/최지혜]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8일 23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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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최지혜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최지혜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TV를 보면서 잡지를 뒤적이고 동시에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한다. 16부작 드라마를 정주행하지 않고 유튜브 요약 영상을 찾아본 후 그 드라마를 본 것처럼 동료들의 대화에 낀다. 지하철에서는 환승 통로나 출구와 가장 가까운 차량 위치에 미리 가 있는다.

혹시 지금 당신의 모습은 아닌가.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이 늘 바쁘다고는 하지만, 요즘 사람들의 시간관념은 예전과 확연히 다르다. 시간을 매우 효율적으로 쓰고, 극한의 ‘시간 가성비’를 추구한다. 시간에 매기는 가치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지고 있다. 이처럼 시간 효율성을 최적화하려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모두가 분초(分秒)를 다투며 살게 됐다는 의미에서, ‘분초사회’라고 한다.

분초사회는 다양한 영역에서 관찰된다. 최근 반차를 넘어 ‘반반차’ 또는 ‘반반반차’를 도입하거나 도입을 검토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는 것도 그 한 예다. 비슷한 맥락에서 ‘짬PT’, ‘틈새PT’ 등 점심시간을 쪼개서 운동을 즐기는 경우도 많다.

한정된 시간을 압축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배속시청이나 몰아보기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행태도 분초사회를 뒷받침한다. 최근에 대학생과 영화관의 위기에 관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왜 사람들은 영화관에 가지 않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해당 학생은 “배속시청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2배속으로 즐기던 세대에게 2시간 남짓의 정속시청은 웬만한 재미가 아니고서야 견딜 수 없는 속도다. 빅데이터 분석 플랫폼 모바일 인덱스에 따르면 넷플릭스의 2023년 1월 월간 순 방문자(MAU)는 1258만 명이었는데, 유튜브의 어느 채널에서 편집한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몰아보기 영상의 조회 수가 1381만 회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점점 짧은 길이로 핵심, 결론만 제시하는 콘텐츠 경향성이 짙어지는 추세다. 기승전결에서 ‘기승전’을 기다릴 시간이 없기 때문에 ‘결론’만 소비하는 것이다. 이는 독서 행태에도 변화를 예고한다. 독서량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가운데, 책 내용을 5분으로 압축해 알려주는 ‘쇼트북(Short Book)’ 서비스는 늘고 있다. 새롭고 재미있는 것을 경험할 때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을 ‘도파민’이라고 부르는데, 재미없는 순간을 단 1초도 견디지 못해 도파민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을 찾아 모으는(farming) ‘도파밍’ 트렌드도 나타난다.

시간이 중요하기 때문에 실패도 용납되지 않는다. 어떤 드라마를 끝까지 봤는데 재미가 없었다거나 폭풍 검색으로 재킷을 구매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면 돈의 실패이기도 하지만 시간의 낭비이기도 하다. 따라서 요즘 소비자에게 ‘실패 소비’란 없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실패를 줄이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한다. ‘착용 컷보다 구매자의 실제 리뷰 사진을 참고할 것’, “구매 후기를 검색할 때는 ‘낮은 평점’ 순으로 읽어가며 광고성 ‘리뷰’를 걸러낼 것”, ‘무료 반품이 된다면, 컬러와 사이즈를 여러 개 주문한 뒤 맞는 것만 남기고 환불할 것’ 등 다년간 축적된 온라인 쇼핑 노하우가 총동원된다.

디토(Ditto)소비는 실패 없는 쇼핑을 위한 최적의 대안이다. 디토(Ditto)란 ‘나도’를 의미하는데, 복잡한 소비 환경 속에서 구매 결정의 수고를 덜기 위해 특정 인물·콘텐츠·커머스를 추종하는 소비를 디토소비라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인플루언서를 따라서 구매하는 것이다. 아마존에서 신발끈 하나를 검색해도 2000개가 넘는 상품이 뜨는 시대다. 시간을 아끼고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 믿을 만한 인물을 추종하면서 ‘네가 사면 나도 사는’ 것이다.

이처럼 소비자들이 극도의 시성비를 추구하게 되면서 비즈니스는 소비자의 시간을 어떻게 점유하고 낭비되는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관리해 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숙제가 됐다. 일례로, 최근 모바일 플랫폼을 뜨겁게 달군 키워드는 ‘게임’이다. 올웨이즈가 쏘아 올린 플랫폼 내 디지털 농사게임 열풍은 공구마켓, 마켓컬리, 팔도감 등으로 이어졌다. 게임을 도입한 이유는 고객의 체류 시간을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웨이즈의 이용자 월평균 사용일수는 18.6일로 쿠팡(15일)보다 많다. 하루 평균 사용 시간도 34분으로 쿠팡의 3배 수준이다.

서울의 한 백화점 식당 테이블에 붙어 있는 QR코드. 이 QR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테이블에서 메뉴 확인은 물론이고 주문, 계산까지 원스톱으로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현대백화점 공식 블로그
서울의 한 백화점 식당 테이블에 붙어 있는 QR코드. 이 QR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테이블에서 메뉴 확인은 물론이고 주문, 계산까지 원스톱으로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현대백화점 공식 블로그


고객의 시간이 낭비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지하 1층 ‘가스트로 테이블’은 테이블에서 메뉴 확인은 물론 주문 및 계산까지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는 ‘테이블 오더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고객이 앉은 자리에서 주문과 계산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서비스로, 고객 스마트폰으로 테이블에 비치된 QR코드를 스캔하면 된다.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한다면, 기다리는 시간을 지루하지 않도록 ‘느끼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요즘 스마트 웨이팅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곳이 거의 없지만, 물리적으로 소비자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발생한다면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게임이나 이벤트를 마련한다거나 소소한 다과를 준비하는 등의 방법이 가능할 것이다.

한편으로 분초사회 트렌드의 확산은 소비자가 우리에게 내어준 시간의 의미를 새삼 일깨우게 한다. 우리 매장을 찾아오기 위해 사용한 이동 시간, 우리 콘텐츠를 보기 위해 흘려보낸 시간, 우리 제품을 고르기 위해 고민한 시간들은 다른 수많은 대안을 포기하고 내어준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소비 시장의 패러다임은 소비자의 시간을 점유하는 ‘시간 경쟁’으로 바뀌고 있다. 1분 1초의 시선과 발길을 사로잡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한 해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소비자의 시간을 관리하고 디자인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할 것이다. 더불어 귀한 시간을 내어 이 글을 읽고 계실 독자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분초사회#짬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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