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이다. 눈이 내릴 때마다 찾아 듣는 각자의 겨울 노래가 있을 것이다. 미스터투의 ‘하얀 겨울’이나 터보의 ‘회상’이 대표적이고, 최근에는 자이언티와 이문세가 함께 부른 ‘눈’도 고전의 대열에 합류해 가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겨울이 되면 찾아 듣는 노래들이 몇 있다. 김현철이 부른 ‘눈이 오는 날이면’이나 조동진의 ‘진눈깨비’ 같은 노래들은 대중적으로 유명하진 않지만, 노래를 듣고 있으면 겨울의 이미지에 더 푹 빠지게 한다.
김현식의 ‘눈 내리던 겨울밤’도 빼놓을 수 없다. 학창 시절 처음 들은 이 노래는 듣는 순간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김현식의 포효와 봄여름가을겨울의 연주는 극적인 곡의 구조와 함께 겨울밤의 분위기를 더 깊게 해주었다. 처음 들은 이후부터 ‘눈 내리던 겨울밤’은 나만의 겨울 노래 목록에 자리했다.
‘눈 내리던 겨울밤’의 ‘오리지날’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 건 한참의 세월이 지나서였다. 김현식이 직접 만들고 부르기까지 한 노래의 원곡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눈 내리던 겨울밤’을 처음 부른 가수의 이름은 이화, 대중에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가수보다는 당시 CF, 즉 광고 음악에서 더 빛을 발했다. 또 많은 가수의 앨범에 코러스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처럼 가수 이화보단, 음악계의 뒤에서 더 많은 역할을 했던 보컬리스트였다.
이화의 이름은 뒤늦게 애호가들 사이에서 회자됐다. 1981년 이화는 첫 앨범을 발표했지만,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앨범의 타이틀곡은 5년 뒤 김현식이 다시 부르는 ‘눈 내리던 겨울밤’이었다. 앨범에는 ‘눈 내리던 겨울밤’뿐 아니라 이장희·이승희 형제가 만들어 준 곡, 그리고 재즈와 영화음악으로 일가를 이룬 정성조의 곡과 연주가 담겨 있었다. 질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는 앨범이란 뜻이다. 이 곡들을 더욱 빛나게 해준 건 단연 이화의 목소리였다. 이화는 마치 프렌치 팝이나 챔버 팝을 부르듯 당시 한국에선 쉽게 들을 수 없는 ‘꿈결 같은’ 목소리를 들려줬다. 위의 대단한 음악인들이 그의 앨범에 참여하고 곡을 제공한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앨범은 실패했고 이화는 이후 몇 장의 앨범을 더 발표했지만 잊힌 가수가 됐다. 이화의 이름이 다시 회자된 건 최근의 바이닐 열풍과 옛 가요를 향한 젊은 세대의 재평가 움직임 덕분이었다. 쉽게 구할 수 없어 가요 애호가들에게 전설처럼 이야기되던 이화의 앨범은 얼마 전 CD와 바이닐로 재발매됐다. ‘전설 같다’는 건 부풀려지기 마련이지만, 수월하게 구할 수 있게 된 이화의 음악은 이제 다시 온전한 평가를 받을 기회를 얻었다. 김현식의 노래와는 또 다른 청아한 ‘눈 내리던 겨울밤’을 쉽게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폭설이 내린 어제, 오랫동안 봉인돼 온 이화의 ‘눈 내리던 겨울밤’을 들었다. 30여 년 전의 겨울 노래를 2024년 새해에 듣는다. ‘눈’과 ‘겨울’과 ‘밤’을 담은 감성은 조금도 바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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