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업공정유통법’ 논란
‘검정고무신’ 사건 계기로 비용 전가 금지 추진에
“웹툰 산업 발전 저해” 우려… “신인 작가들에 불리” 지적도
출협 “입법 창작자, 독자에 이익”
작가 “권리 보호 위해 필요”… 전문가들 “사회적 합의 거쳐야”
《이른바 ‘검정고무신 사건’을 계기로 입법이 추진되고 있는 ‘문화산업의 공정한 유통환경 조성에 관한 법률안(문화산업공정유통법)’을 두고 찬반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법 제정 과정에서 웹툰계의 여론이 제대로 수렴되지 않았고, 시행 시 웹툰 산업이 위축될 수 있다는 지적에 따른 것. 반면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선 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반론이 나온다.》
● “초반 회차 무료 공개 막힐 수 있어”
문화산업공정유통법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건 1990년대 인기 만화 ‘검정고무신’의 이우영 작가가 출판·캐릭터 업체 형설앤과의 저작권 분쟁 도중 지난해 3월 세상을 등지면서부터다. 이 작가와 형설앤이 2007년 맺은 계약에 검정고무신 저작물 관련 사업화를 형설앤이 포괄적, 무제한, 무기한으로 할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갔다는 게 이 작가 측 주장이다. 15년간 검정고무신 이름으로 77개의 사업이 이뤄졌지만 작가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고, 고인이 이 기간 받은 금액은 1200만 원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 작가의 죽음을 계기로 신인 창작자에게 저작권을 영구 양도받는 출판계 계약 관행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결국 정부와 국회가 ‘제2의 검정고무신’을 막겠다며 입법을 추진했다. ‘검정고무신법’으로 불리는 문화산업공정유통법은 지난해 3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했다.
하지만 웹툰계에선 이 법이 포괄적 규제를 명시해 웹툰 산업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사단법인 웹툰협회는 5일 성명서를 내고 “제작과 유통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주요 법안 통과를 코앞에 두고도 어느 누구 하나 우리 웹툰계에 여론 수렴 과정을 일절 거치지 않았다”며 “법안 통과 연기를 요청하고 시급히 웹툰업계 각 주체의 해당 법안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의 장을 마련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밝혔다.
특히 웹툰계에선 법안에서 불공정행위로 규정하는 ‘판매촉진비 및 가격할인 비용 전가’ 규정이 웹툰 성공에 상당한 역할을 한 사업모델을 없앨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초반 회차를 무료로 공개해 독자들의 흥미를 끈 뒤 뒷이야기의 유료 결제를 유도하는 웹툰 플랫폼의 ‘기다리면 무료’, ‘매일 열 시 무료’는 작가에게 수익 배분이 이뤄지지 않아 불공정행위에 해당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범강 한국웹툰산업협회장은 “한국 웹툰이 세계 시장에 진출하려는 때에 부적절한 규제가 시장 확대를 막을 수 있다”며 “법안의 입법 취지는 좋지만 선의가 왜곡돼 업계에 부정적인 영향만 끼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초반 회차 무료 공개의 비용을 플랫폼이 모두 감당할 경우 흥행이 보장되지 않는 신인 작가 등은 화면 배치 등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결과적으로 유명 작가의 작품에만 독자가 쏠려 작품 다양성이 줄어드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것.
특히 콘텐츠 제작사(CP)들은 법 규정 중 ‘문화상품을 납품한 후에 해당 문화상품의 수정·보완 또는 재작업을 요구하면서 이에 소용되는 비용을 보상하지 아니하는 행위’를 금지한 데 대해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CP 관계자는 “웹툰 제작 과정에서 작업물의 수정을 요청하는 일은 항상 발생한다. 수정 비용을 일일이 지급해야 하면 작품 수정 자체를 요청하지 않아 작품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고 했다.
● “창작자 보호 위해 입법 필요”
반면 출판계나 작가들은 ‘제2의 검정고무신’ 사건을 막기 위해선 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반박한다. 네이버, 카카오가 운영하는 웹툰 플랫폼의 횡포를 막고, 작가들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법이 필요하다는 것.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는 지난해 12월 27일 성명서를 내고 문화산업공정유통법 입법을 지지했다. 출협은 성명서에서 “네이버, 카카오 등 국내 대기업 유통사들은 규제 법안이라며 무조건 반대만 하지 말고, 창작자와 독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생태계 조성에 협력해주기를 바란다”며 “국회는 해당 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 웹콘텐츠 생태계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출협은 초반 회차 무료 공개가 온라인 플랫폼의 배만 불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플랫폼이 부담해야 할 마케팅 비용을 작가가 떠안는다는 것이다. 박용수 출협 전자출판·정책 담당 상무이사는 “초반 무료 공개로 플랫폼에 유입되는 독자가 증가해 플랫폼의 광고 수익이 늘었다. 하지만 정작 유료 결제는 늘지 않아 작가가 이득을 보지 못하는 구조”라며 “과거 웹툰 플랫폼들이 독자에게 무료로 일부 작품을 제공하면서 작가에게 이를 금전적으로 보상한 적이 있다. 법을 통해 현재의 기형적인 구조를 정상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법으로 ‘판매촉진비 및 가격할인 비용 전가’를 금지하면 작가의 수익이 늘어날 거라는 기대도 있다. 독자가 무료로 웹툰을 보지 못하면 유료 결제가 늘어날 거라는 얘기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3 만화·웹툰 이용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웹툰 이용자 45.6%가 웹툰 유료 결제 경험이 있었다. 특히 1주일에 1번 이상 유료 결제를 한다는 이들이 전체의 21.7%로 유료 결제 비율이 적지 않았다. 또 웹툰 유료 결제 경험자 중 한 달에 5000원 이상을 쓴다는 비율도 53.5%로 유료 결제가 앞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나온다. 웹툰계 관계자는 “독자들의 결제를 유도하려면 작가들이 내용이 참신하고 재밌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며 “작가의 수익이 늘면 제작환경도 개선돼 작품의 질이 높아지는 선순환이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웹툰 작가들도 법안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한 웹툰 작가는 “법안이 창작자를 보호한다는 취지인 만큼 제대로 입법이 이뤄진다면 작가들의 권리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웹툰 작가는 “검정고무신 사건 이후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만큼 이번 기회가 아니면 법안 통과가 힘들다”고 했다. 권혁주 웹툰작가협회장은 “물론 법안 자체의 취지는 좋지만 쇠뿔 뽑다가 소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며 “법안 통과 과정에서 시행령을 섬세하게 조정하고 취지를 살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전문가들 “비용 분담 등 사회적 합의 필요”
현재 문화산업공정유통법은 국회에 계류된 상태다. 검정고무신 사건을 계기로 지난해 통과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문체위로 법안이 환송됐다. 법사위 논의 단계에서 금지행위로 규정한 조항들이 공정거래법에서 규율하는 불공정 거래행위와 겹쳐 중복 규제라는 지적이 나온 데 따른 것이다. 방송사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만큼 법안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해당 법안이 다양한 규제를 포괄하고 있는 만큼 공정거래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등 관련 부처 간 조정도 필요하다. 국무조정실이 부처 간 업무 조정을 하고 있는데, 부처 간 협의를 거쳐 세부 조문을 수정할 예정이다. 윤양수 문체부 콘텐츠정책국장은 “법안의 취지를 살리면서도 다양한 우려를 반영하겠다. 법안이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창작자 보호 법안이 정착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이융희 문화연구자(전 세종사이버대 만화웹툰창작과 겸임교수)는 “정부 부처가 웹툰계와 협의를 통해 방향성을 정하고 반발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초반 회차 무료 공개에 드는 비용을 플랫폼과 CP가 분담하도록 정부가 유도하려면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창완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텍 교수는 “창작자뿐 아니라 플랫폼 등 웹툰계 전체의 목소리를 들어 법 조항을 세밀하게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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