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2년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가 사망했다. 시아파는 후계자로 무함마드의 사촌 동생 겸 사위 알리를 추대했다. 수니파는 혈연관계가 없지만 독자 세력이 강했던 무함마드의 친구 겸 후원자 아부바크르를 옹립했다. ‘피’를 앞세웠지만 ‘힘’에선 밀린 알리는 살해당했다.
이후 약 1400년간 시아파는 단 한 번도 소수파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현재도 18억∼20억 명으로 추산되는 전 세계 이슬람 인구의 10∼15%에 불과하다. 오랜 대립 역사로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스라엘이나 미국 같은 ‘공동의 적’이 없었다면 같은 종교의 범주에 묶여 있지도 않고 내내 전쟁을 벌였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양측은 치열한 ‘체제 경쟁’을 벌인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 수니파 왕정국은 오일머니를 이용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세속주의 사회’를 지향한다.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왕정을 몰아낸 이란은 ‘풍족하진 않아도 이슬람 교리를 따르는 신정일치 국가가 최고’란 자부심으로 산다. 무함마드의 후계자 경쟁 때 수니파와 시아파가 각각 ‘영향력’과 ‘정통성’을 내세웠던 것과 비슷하다.
‘쪽수’에서 밀리는 시아파 맹주 이란은 세력 확장에 사활을 건다. 2002년 핵 개발 의혹이 제기된 후 20년 넘게 서방의 경제 제재를 맞으면서도 레바논 헤즈볼라, 예멘 후티, 이라크 카타입헤즈볼라(KH) 등 인근 시아파 무장세력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수니파인 팔레스타인의 양대 무장단체 하마스와 팔레스타인이슬라믹지하드(PIJ) 또한 후원했다. ‘중동 내 영향력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도 끝’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2020년 1월 미군의 공개 살상으로 숨진 가셈 솔레이마니 전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은 이 해외 무장세력 지원을 담당한 이란 최고위 인사다. 혁명수비대 내에서도 해외 작전과 특수전을 담당해 최정예로 불리는 쿠드스 대원들은 오합지졸 상태인 곳곳의 시아파 민병대를 체계적으로 교육했다. 미사일, 무인기 등도 보급해 정규군 수준으로 키웠다.
이를 통해 이란은 시리아 레바논 예멘 이라크와 자국을 잇는 거대한 ‘시아파 벨트’를 구축했다. 주변국을 사실상 위성국으로 만들었기에 굳이 자국군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수니파 왕정국, 이스라엘, 미국 등을 군사적으로 압박할 수 있었다. 솔레이마니가 고국이 아닌 이라크 바그다드공항에서 숨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14, 2015년 거듭된 테러로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3일 솔레이마니의 4주기 추도식장에서 테러를 저질렀다. 시아파 세력 확장에 평생을 바친 솔레이마니의 상징성을 감안해 의도적으로 장소를 골랐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잊혀진 존재로 전락한 IS 입장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존재감을 과시해야 재기를 도모할 수 있다. 이에 수니파가 눈엣가시로 삼던 솔레이마니의 묘지 인근에서 폭탄을 터뜨려 건재를 알리려 했다는 의미다.
IS만 사자(死者)의 상징성을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란과 시아파 무장단체 또한 ‘순교자’로 추앙받는 솔레이마니의 후광이 절실하다. 이란은 만성 경제난, 히잡 의문사 규탄 시위 등 문제가 산적해 있다. 시아파 무장단체는 이란의 지원이 없으면 존립 자체가 어렵다. 죽은 솔레이마니를 내세워야만 내부 불만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이를 감안할 때 수니파와 시아파의 극한 갈등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살아서도 전쟁터만 누빈 솔레이마니가 땅속에서조차 평안을 누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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