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을 부른 초상화[이은화의 미술시간]〈301〉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10일 23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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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얼음판 위에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스케이트를 타고 있다. 차림새로 보아 귀족이나 상류층으로 보인다. 18세기 후반, 스케이트 타는 상류층 남자의 초상화는 상당히 이례적인 주제였다. 게다가 화가는 27세의 화가 견습생이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렸을까?

‘스케이트 타는 사람’(1782년·사진)은 미국의 유명 초상화가 길버트 스튜어트의 초기 대표작이다. 스튜어트는 20세 때 영국 런던으로 가 벤저민 웨스트 화실의 견습생이 되었다. 이 초상화는 가난한 견습생이었던 그에게 첫 명성을 안겨 주었을 뿐 아니라 5년간의 도제 생활도 끝내게 해줬다. 모델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젊고 부유한 변호사 윌리엄 그랜트다. 의뢰인은 전신 초상화를 원했지만, 화가는 흉상밖에 그려 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망설였다. 그러다 그랜트가 모델을 서기 위해 화실에 찾아온 날, 하필이면 강추위가 절정에 달했다. 그랜트가 말했다. “너무 추워서 초상화를 그리기보다는 스케이트 타기에 더 적합한 날이군요.” 화가도 동의했다. 그래서 둘은 하이드파크로 가 얼어붙은 서펜타인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얼음판 위를 신나게 달리며 땀을 흘려서였을까?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었던 스튜어트의 머릿속에서 눈 녹듯 새로운 아이디어가 흘러넘쳤다. 자신 없었던 전신 초상화에 대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스승의 화실로 돌아온 스튜어트는 모델에게 동의를 얻어 바로 초상화에 착수했다. 그림 속 그랜트는 팔짱을 낀 채 스케이트를 타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멀리 스케이트 타는 신사들 무리 뒤로 런던 도심의 풍경도 그려 넣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도 보인다.

완성된 그림은 1782년 왕립예술원 전시에 출품돼 주목받았다. 독창적인 초상화라는 호평을 받았다. 이후 스튜어트는 독립적인 화실을 냈고, 영국에서 가장 비싼 초상화가 반열에 올랐다. 그랜트도 8년 후 국회의원이 되어 웨스트민스터 궁에 입성했다. 화가에게도 모델에게도 행운을 가져다준 초상화였다.

#초상화#길버트 스튜어트#스케이트 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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