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정부 청와대, 대통령실에 있었던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선거를 앞두고 정부, 여당이 쓸 수 있는 카드는 너무나 많다”는 거다. 22대 총선을 석 달 앞두고 윤석열 정부는 이런 말을 확인시켜 주려는 듯 연일 대형 정책 카드를 봇물처럼 쏟아내고 있다.
윤 대통령은 2일 한국거래소 개장식에서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를 추진하겠다”면서 1400만 주식투자자를 겨냥해 깜짝 카드를 꺼냈다. 며칠 뒤엔 은퇴 노인 등 건강보험 지역가입자의 보험료를 깎아주기 위해 자동차에 물리는 추가 보험료를 없애고, 집에 물리는 보험료도 경감해 주는 대책을 발표했다. 부가가치세를 적게 내는 간이과세 영세사업자의 범위를 연 매출 8000만 원에서 1억 원 정도로 확대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라고 한다.
큰 선거를 앞두고 ‘민생 대책’이란 이름으로 정부가 선심성 정책을 내놓는 데에 우리 국민은 이미 익숙하다. 4년 전 문재인 정부는 4·15총선을 불과 며칠 앞두고 피해가 가시화하지도 않은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며 초유의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결정했다. 4인 가족 기준 100만 원씩 나눠준 돈으로 “오랜만에 한우를 사먹었다”는 이들이 속출했다. ‘고무신 선거’의 재현이란 비판이 나왔지만 여당의 압도적 대승에 끼친 효과는 확실했다.
문 정부의 재난지원금과 윤 정부 민생 대책 시리즈는 현금을 직접 쏘느냐, 세금 등의 부담을 줄여주느냐 차이가 있다. 경제논리로 따지자면 나랏빚을 늘리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현금 살포보다 재정을 보수적으로 운영하면서 세금을 깎아주는 게 낫다. 그렇다고 급조한 정책에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다. 대선 공약에 없던 금투세 폐지, 간이과세 대상자 확대는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세정(稅政)의 기본 원칙을 흔들어 장기적으로 나라 살림에 악영향을 미친다. 지역가입자 건보료 인하는 향후 전체 가입자의 보험료 인상 압력을 높일 것이다.
30%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을 빼고는 해당 부처 장관들조차 논리적 설명이 어려워 말이 꼬이는 정책을 안면몰수하고 추진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역대 최악의 비호감 선거’로 불렸던 지난 대선의 후유증이 이번 총선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사이 대통령이 착실히 호감도를 높여 지지율 50%를 넘겨 놨다면 지금처럼 부작용이 예상되는 벼락치기 정책을 내놓을 필요가 있겠나. 최소 몇 %의 지지율을 끌어내리는 ‘김건희 리스크’도 정부 정책의 부담이 됐다고 봐야 한다.
4년 전 상황도 비슷했다. 문 정부가 임기 초 무리하게 올린 최저임금 때문에 자영업자들의 고통이 커지고, 일자리는 급감했다. 선거 전년도부터 집값, 전셋값이 폭등한 데다 코로나19 초기 대응 실패로 정권의 비호감도가 극에 달했다. 결국 재난지원금이 풀렸고, 임기 중 400조 원 넘게 늘어난 나랏빚과 인플레이션이란 부작용이 남았다. 지난 대선의 다른 주역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기본소득을 비롯한 과감한 돈 풀기 약속으로 높은 비호감도를 극복해 왔다. 부산 흉기 피습 이후 서울로 이송되는 석연찮은 과정 때문에 부산 지역 호감도가 떨어졌다는데, 이를 넘어서기 위해 또 어떤 카드를 꺼내들까 궁금하다.
큰 개혁을 이룬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존 F 케네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정당, 이념을 떠나 높은 개인적 호감도가 강점이었다. 평소 쌓아둔 ‘호감 점수’가 있었기에 정치·경제·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국민에게 인내를 요구할 수 있었다. 당장 입에 단 곶감을 물려주는 대신 개혁의 고통을 분담해 달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호감 정치인’을 우리 국민은 언제쯤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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