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이용한 뱃사람 용인술[김인현의 바다와 배, 그리고 별]〈83〉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11일 23시 18분


술은 적당히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잠도 잘 와서 좋다. 또 말문이 터져서 평소에 감정이 있던 사람과도 대화의 창이 열린다. 그래서 술을 통해서 인간관계가 더 좋아진다. 그러나 지나치면 사고가 난다. 인사불성이 되면 사람이 실수를 하게 된다. 선장은 절대로 술로 인해 인사불성이 되면 안 된다. 선장은 선박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적당히 취한 척할 뿐이지 절대로 선원들보다 먼저 취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 나는 이런 바다의 가르침을 잘 따랐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배에서는 술 때문에 좋은 일, 나쁜 일도 많이 생긴다. 승선하게 되면 가장 놀라는 것이, 조니워커 위스키가 그렇게 쌀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조니워커 레드 같은 경우에는 병당 1만 원에 면세로 살 수 있다. 처음 승선한 선원들은 몇 병을 사서 물 마시듯이 막 마신다. 3등 항해사가 면세품 담당이다. 그 당시엔 발렌타인은 몰랐고 조니워커 블루가 최고급이었다. 휴가 때 한 병씩 사서 친구들에게 선물하면 다들 좋아라 했다.

소금구이 등 고기를 구워 먹을 때에는 뭐니 뭐니해도 우리나라 소주가 최고였다. 1982년 첫 배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었다. 금주의 국가라서 아예 술을 살 수가 없었다. 궁하면 통하는 법. 마침 예인선에서 일하는 한국 선원들이 한국을 떠날 때 싣고 온 소주가 있다고 했다. 그 배에 숨어 들어가서 모르게 한 잔씩 했다. 맛이 너무 좋았다. 사우디에는 비알코올성 맥주라고 맛없는 맥주만 있었다. 밍밍했다. 고국 생각이 절로 났다.

적도제를 지낼 때다. 배에서는 흥겨운 큰 행사다. 소주를 한잔 걸치게 된다. 술판이 길어졌다. 평소에 기관장에게 감정이 있던 하급선원이 잔뜩 취했다. 기관장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겨우 뜯어말렸다. 밤이 되자 이번에는 흉기를 들고 야단을 쳤다. 창고에 그를 가두고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송출선은 10개월이 넘어야 귀국이 가능하다. 고국을 떠난 지 6개월이 넘어서면 선원들은 예민해진다. 더구나 보름 동안 항해만 하게 되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아주 사소한 감정들이 쌓인 상태에서 술까지 마시면 싸움이 터진다. 노련한 선장은 분위기가 이상하다 싶으면 금주령을 내린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술을 이용한 용인술도 있다. 뱃사람들은 화끈하다. 그래서 ‘돈내기’라는 것을 좋아한다. 주어진 일을 잘하면 어떤 대가를 주는 것이다. 이틀 내에 주어진 일을 마치면 선장이 위스키 한 병에 맥주 2박스를 준다고 선원들에게 약속한다. 별것은 아니지만 선원들은 힘을 내어 열심히 일한다. 성과를 내어 선장이 선물로 내어주는 위스키와 맥주로 선원들은 피로를 달랜다. 이에 질세라 기관장도 돈내기를 건다. 하루 이틀 사이에 끝내야 하는 화물창 청소를 할 때 이런 돈내기가 필요하다. 산더미 같던 일도 선원 20명이 합심하여 목적을 달성했다.

배에서는 탁구를 친다. 운동도 되고 단합도 되고 건강에도 좋다. 점심 식사 후 2시간 정도 탁구를 치고 나면 땀이 많이 난다. 게임을 마치고 마시는 찬 맥주 한 잔은 그렇게 시원하고 맛있을 수가 없다. 배에서 마시는 최고의 술맛이다. 이런 맛으로 배를 탔다.

#술#뱃사람#용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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