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국민의힘이 어제 당정협의회를 열어 자영업자·소상공인의 대출 연체 기록을 삭제하는 ‘신용사면’을 추진하기로 했다. 코로나19로 영업이 어려워 금융회사에서 빌린 돈을 제때 못 갚아 신용도가 떨어진 자영업자들이 대출 등에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290만 명이나 되는 수혜자들의 연체 기록이 지워질 경우 금융회사들이 우량 대출자와 부실 대출자를 구분할 기준이 없어진다는 게 문제다.
당정이 합의한 신용사면의 대상은 2021년 9월부터 이달까지 2000만 원 이하의 연체를 했던 사람 중 올해 5월 말까지 빚을 모두 갚는 자영업자와 취약계층이다. 3개월 이상 연체한 기록이 남아 있는 290만 명이 혜택을 볼 전망이다. 2021년 10월에도 코로나19 충격으로 연체한 개인사업자 230만 명의 기록을 삭제해준 적이 있다. 당시엔 2020년 1월부터 2021년 8월까지 2000만 원 이하를 연체한 채무자 중 2021년 말까지 빚을 갚은 이들이 대상이었다.
하지만 팬데믹이란 재난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정부가 나서서 연체 기록을 지워주는 일이 반복되면 금융산업의 근간인 신용 질서가 흔들리고,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우려가 크다. 빚 잘 갚는 채무자와 자주 연체한 채무자를 구별할 수 없으면 금융회사는 전체 대출금리를 높이고, 한도는 줄이게 된다. 힘들어도 꼬박꼬박 빚 갚은 사람들이 불이익을 받게 된다는 의미다.
연체 기록이 삭제된 자영업자들이 다시 대출을 받으려고 몰릴 경우 1052조6000억 원까지 불어난 자영업자 대출 규모가 급증할 우려도 있다. 전체 금융권 자영업자 대출의 연체율은 재작년 말 0.69%에서 지난해 9월 말엔 1.24%로 높아지는 등 빚의 질도 계속 악화하고 있다. 자영업자 대출 관리의 고삐를 풀 게 아니라 오히려 단단히 조여야 할 때다.
이번 신용사면은 4·10총선을 두 달 앞둔 2월 설 연휴 직전에 시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통령의 ‘은행권 종노릇’ 비판과 금융당국의 압박으로 은행들이 자영업자 187만 명을 대상으로 2조 원 규모의 지원방안을 내놓은 게 불과 3주 전이다. 550만 자영업자들에게 초점을 맞춘 잇따른 조치는 결국 총선을 겨냥한 정부 여당의 선심 공세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