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인 사망자만 최소 1258명에 이르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책임을 둘러싼 공방은 이 사건이 공론화된 지 14년째 이어지고 있다. 옥시의 전 대표는 2018년 유죄가 확정돼 이미 형기를 끝마쳤다. 반면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의 전 대표는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가 11일 진행된 항소심에서 유죄로 뒤집혔다. 이들 제품에 쓰인 화학 원료가 인체에 유해한지에 대한 판단이 관건이었다.
▷옥시가 만든 ‘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의 주원료는 PHMG다. 피부에 닿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흡입하면 폐 질환을 일으킬 수 있는 성분이라는 점이 확인됐고, 옥시 전 대표는 1심부터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SK케미칼과 애경이 만든 ‘홈크리닉 가습기메이트’의 원료인 CMIT·MIT는 유해성을 입증하기가 한층 까다로웠다. 결국 1심 재판부는 ‘SK·애경이 만든 살균제와 옥시의 살균제는 성분이나 위해성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1심 판결 이후 국립환경과학원에서 CMIT·MIT가 호흡기를 통해 폐로 전달된다는 점을 입증하는 논문을 발표하는 등 새로운 연구 결과들이 나왔다. 이를 근거로 항소심 재판부는 SK케미칼·애경의 살균제를 사용한 것과 폐 질환과의 인과관계가 입증됐다고 판단했다. 특히 안전성에 관해서는 제조·판매업자에게 강력한 주의 의무가 요구된다는 것이 법원의 시각이다. 원료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 길이 없는 소비자로서는 ‘인체에 해가 없는 제품’이라는 업체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더 근본적으로는 SK케미칼의 전신인 유공이 1994년 살균제를 만들 때부터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유공은 독성시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제품 출시를 강행했고, 이듬해 서울대에서 ‘문제 소지가 있으니 추가 실험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는데도 판매 중지나 회수 조치를 하지 않았다. 2002년 이 제품을 이어받은 홈크리닉 가습기메이트를 생산할 때도 별도의 검사는 없었다. 그 결과 “장기간에 걸쳐 전 국민을 상대로 살균제의 만성 흡입 독성시험이 행해진 사건”이 됐다고 재판부는 질타했다.
▷가습기 살균제는 그동안 약 900만 명이 사용했을 만큼 인기 제품이었고 주로 큰 기업들이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불거지자 기업들은 ‘유해 성분인지 몰랐다’ ‘살균제가 피해의 원인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등의 변명만 내놨고, 이는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다. 대법원의 최종심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번 재판을 통해 가습기 살균제 업체들의 법적 책임은 보다 분명해졌다. 기업들이 하루라도 빨리 배상·보상 방안에 합의해 피해자의 어려움을 덜어 주는 게 조금이나마 사회적 책임을 지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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