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당의 “독립만세”[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330〉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16일 23시 24분


1945년 8월 광복이 됐을 때, 충남 부여군 충화면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사람들은 과거를 떨쳐내기 시작했다. 충화초등학교 신사당도 헐렸다. 그것은 일본이 내선일체를 도모한다며 건국 신화의 태양신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신주를 받들도록 강요한 사당이었다. 누구든 그 앞을 지날 때는 절을 해야 했고, 매월 8일에는 면 단위 기관장들과 직원들과 학생들이 신사당 뜰에 모여 손뼉을 세 번 치고 절을 하는 의식을 했다. 그게 신사참배였다. 그런데 광복 직후 사람들이 신주를 태우려고 내용물을 꺼내자 대조선독립만세(大朝鮮獨立萬歲)라고 쓰인 백지가 나왔다.

그것을 쓴 사람은 열세 살 소년이었다. 어머니를 따라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1942년 어느 날 밤, 작은 도끼를 들고 신사당을 부수러 갔다가 뜻대로 안 되자 위패를 집으로 가져왔다. ‘천조황태신궁(天照皇太神宮)’이라고 쓰인 겉봉투를 벗겨내자 은행나무 판자가 나왔고 거기에 끝이 들쑥날쑥한 백지 한 겹이 길게 붙어 있었다. 그는 먹을 갈아 그 백지에 ‘대조선독립만세’라고 썼다. 그리고 위패 봉투에 집어넣고 신사당에 갖다 놓았다. 그러니 이후로는 참배객들이 조선 독립을 기원한 셈이었다. 발각됐다면 소년의 집안 모두가 뼈도 못 추렸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 일과는 별개로 소년은 열네 살 때인 1943년, 형 대신 납치당해 홋카이도에 있는 미쓰이(三井) 회사의 백금 광산으로 끌려갔다가 광복 이듬해에 돌아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노예로서의 광산 노동과 야만적인 폭력, 탈출 등 자신이 겪은 일들을 소설의 형식으로 증언했다. 지재관의 ‘도벌에게 짓밟힌 엽전’이 그것이다. 그의 아들인 오페라 작곡가 지성호는 아버지의 증언이 묻히는 게 안타까웠는지, ‘아버지는 14세 징용자였다’라는 좀 더 정교한 책으로 ‘다시’ 썼다. 강제징용이 없었다는 일본의 거짓말은 그 생생한 증언 앞에서 파랗게 질린다. 이러한 증언이 더 많이 나와야 하는 이유다.

#신사당#독립만세#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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