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정부의 ‘쉬운 수능’에 학력 저하 사교육비 증가
대학입시 자율화해도 전국표준시험 무력화는 위험
정부가 중2 학생들이 치르는 2028학년도 수능 개편안을 확정했다. 국영수를 포함한 전 과목을 문과 이과 구분 없이 같은 시험으로 본다는 내용이다. 1994년 수능 도입 후 시험 범위와 성적 산출법 등 크고 작은 변화까지 포함하면 이번이 16번째 개편이다. 고교학점제 도입으로 개편이 불가피했다고 하나 기초학력 저하와 사교육비 증가의 주요 원인이 수시로 바뀌는 교육과정과 입시제도임을 감안하면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잦은 개편보다 심각한 문제가 개편안의 내용이다. 교육부는 이번 개편으로 공교육 정상화, 미래 인재 육성, 사교육비 절감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공교육은 황폐화하고, 미래 세대의 학력은 저하되며, 사교육비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인공지능(AI) 혁명으로 요즘은 문과 출신들도 뒤늦게 수학 공부에 뛰어들고 있는데 수능 수학은 문과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하고, 사회와 과학 출제 범위는 고1 때 배우는 기초적인 내용으로 축소했다. 이과생들의 수학 수업, 고2·3학년의 사회 과학 수업이 제대로 되겠나.
시험이 쉬워지면 학력은 떨어지는 게 경험칙이다. 역대 정부마다 학생들 부담 덜어준다, 창의성 키워준다, 사교육비 줄인다며 쉬운 수능을 표방했다. 김대중 정부는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 간다”며 무시험 전형, 노무현 정부는 수능 등급제, 이명박 정부는 EBS 교재 연계 출제 70%, 박근혜 정부는 영어 절대평가제를 도입했다. 그 결과 국영수 기초학력 미달 학생 비율이 8∼15%로 급등하고, 영어 숙련도 지수(EPI)가 세계 49위로 하락했으며, 서울대 이공계 신입생 10명 중 4명은 고교 수학부터 다시 배우고 있다. 쉬운 입시가 ‘이해찬 세대’를 낳았듯 이번 개편으로 이과생 수학과 물리 실력이 단군 이래 최저인 ‘이주호 세대’가 등장할지 모른다.
학계에서는 쉬운 수능의 다음 단계는 수능 절대평가와 대학 입시 자율화가 될 것이라고 본다. 대학 자율화는 맞는 방향이지만 수능 무력화는 위험한 발상이다. 수능은 학생들이 가장 신뢰하는 전형자료이고, 내신은 곧 변별력이 없는 5등급 상대평가제로 바뀌며, 모든 대학이 자체 기준으로 선발할 역량을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수능 같은 획일화된 시험으로는 잠재 역량을 평가하기 어렵다고들 하지만 대입 전형과 대학 입학 후 성적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12개 논문을 종합한 결과 대학 학점을 가장 잘 예측하는 전형자료는 수능 점수였다(이광현 부산교대 교수 2018년 논문). 최근 미국에서도 고교 내신보다 한국 수능에 해당하는 SAT 성적이 대학 학점이나 졸업 후 유망 기업 취업률과 상관관계가 높고, SAT 성적을 요구하는 전형이 소수 인종과 저소득층 학생들에게도 유리하다는 연구 결과가 잇달아 발표됐다.
대학입시가 자율화된 다른 선진국을 봐도 전국 단위 표준화 시험이 없는 나라는 캐나다가 유일하다. 영국은 A레벨 테스트, 일본은 대학입학공통테스트, 교육 강국 핀란드는 국가대학입학 자격시험을 본다. 학생의 객관적인 학업 성취도를 보여주는 전국 단위 시험 성적은 대학 자체 시험을 따로 보는 경우에도 중요한 전형자료로 활용되는 것이다.
수능은 완벽하지도 않고 특히 서술형 논술형 문제를 보완할 필요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마땅한 대체재도 없는데 수능의 힘부터 빼는 것은 학생들 학력을 위해서도, 공정하고 적합한 입시를 위해서도 도움이 안 된다. 미국 비명문 고교의 흙수저 학생들에게 ‘SAT는 생명줄’로 불린다. 우리도 입시 원서에 적어 넣을 다양한 체험 활동을 할 형편이 못 되는 아이들이 시험 성적만으로 실력을 입증하고 부모보다 나은 삶을 살 기회는 남겨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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