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른 언덕을 오르자 조그만 학교가 한눈에 들어왔다. 20여 년 만에 모교를 찾았다. 모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강연이 있었다. 학교는 세련되게 변했지만 구조는 그대로였다. 익숙한 걸음으로 도서관을 찾아갔다. 예전과 같은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이 시끌시끌 나를 스쳐 갔다. 별관 구석에 유독 으스스했던 낡은 도서관도 그대로일까. 학관에서 구름다리를 건너면 도서관이 있었다.
자주 몽상에 잠기곤 했다. 이 구름다리를 건너 도서관에 들어서면 한 20년쯤 훌쩍 나이 들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때 나는 서서히 부서져 가던 가족의 소란스러운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중학교 졸업 후 부모님은 헤어졌고 나는 고향을 떠났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 시간은 흘렀다. 어느덧 마흔을 앞둔 내가 도서관에 들어섰다. 도서관은 예전과 달리 환하고 따뜻했다. 학급 종례를 마치고 모인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유년과 습작기를 거쳐 작가가 되었는지, 아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는 어떻게 꺼내 볼 수 있는지, 책을 쓰고 나서 어떤 독자들을 만났는지.
우연히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내 책을 읽었다가 인생이 달라졌다던 독자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단 한 사람의 사랑만 있다면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게 메시지를 보내준 인연으로, 나는 그가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생이 될 때까지 지켜보았다. 이제 그는 아이들의 결핍과 아픔을 돌보는 선생님이 되겠다며 공부 중이다. 작은 도서관이, 책 한 권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고 나는 덧붙였다. 강연이 끝나고 한 선생님이 다가와 말해주었다. “청년은 분명 좋은 선생님이 될 거예요.”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당장이라도 열다섯 살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았다. 나는 어떤 책을 읽었더라. 친구와 주고받았던 편지가 떠올랐다. 이해하긴 어렵지만 왠지 멋져 보였던 ‘고독하지 않은 홀로되기’라는 책의 문장을 적어 두었었다. ‘고독하지 않은 홀로되기. 동시에 섬과 섬을 꿈꾸는 배가 되기. 움직이지 않은 채 공간을 차지하고, 쉼 없이 나아가며 시간을 멈추게 하기. 행복해하기, 실망하기, 다시 행복해하기, 끓어오르기, 얼어붙기. 어린 시절 생각하기. 책 읽기.’
20여 년 전의 나를 마주한다. 깊은 슬픔과 고독을 비밀스럽게 견디던 시절이었다고만 기억했었다. 하지만 나는 실망하고도 다시 행복을 꿈꾸고, 책 읽고 몽상하고 편지를 쓰며 쉼 없이 나아갔었다. 고독하지 않은 홀로되기의 시간을 보냈던 거구나. 푸른 어둠에 잠긴 학교를 올려다보다가 걸어 나왔다. 조용히 나에게 속삭였다. 20년 후의 내가 모쪼록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좋은 어른이 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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