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했으니, 세계 곳곳에서 사람이 살고 종교가 있는 곳에서는 꼭 빠짐없이 여신이 등장한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팔등신의 늘씬하고 아름다운 아이돌이나 여배우가 등장하면 ‘여신’이라고 치켜세우곤 한다. 이런 인식은 고대 그리스의 예술에서 즐겨 그려진 비너스, 헬레나, 아프로디테와 같은 여인상의 영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5만 년 전부터 신석기시대에 이르는 동안 여신의 역사 대부분은 풍만하며 육아를 많이 한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고고학이 밝히는 여신의 유물을 통해 여신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다시 살펴보자.》
선사시대 여신은 임신·출산 여성
인류의 역사에서 여신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때는 세계 곳곳이 아직 빙하기였던 후기 구석기시대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로 교과서나 여러 참고서에도 실려 있기 때문에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유물이다. 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여신상과는 거리가 있으니, 털모자 같은 것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몸은 둔부와 가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다. 가슴의 부푼 모양이나 볼록한 배를 근거로 출산을 앞둔 여성을 표현한 것이다. 비록 고대 그리스 신화의 영향으로 ‘비너스’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 다산을 기원하는 지모신의 기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얼마 전 독일의 홀레펠스(Hohle Fels)에서는 그보다 더 오래된 3만7000년 전의 여신상이 뼈로 만든 플루트와 함께 발견되었다. 이 홀레펠스 출토의 여신상은 빌렌도르프보다도 더 그로테스크하다. 얼굴은 아주 작고 반대로 가슴과 허리 부분은 강조가 되어 있다. 음부 부분은 크게 강조되고 배는 푹 꺼지듯 되어 있어서 막 출산을 끝낸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약간씩 형태는 다르지만, 구석기시대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여신상의 특징은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임신하고 육아를 준비하는 여성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다고 숭앙했었다. 그 배경에는 혹독한 환경을 이겨낸 구석기인들의 지혜와 바람이 숨어 있었다.
구석기시대 생존 전략 반영
임산부를 표현한 여신상이 처음 등장한 때는 매머드의 사냥이 널리 유행하던 시기로 매머드를 표현한 벽화나 조각상도 함께 등장한다. 중기 구석기에서 후기 구석기로 넘어가는 과정에 매머드 사냥으로 대표되는 여러 사회적 변화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빙하기 유라시아의 북반구에서 주요한 사냥감이었던 매머드는 초식동물로 지금 먹는 소고기와 육질이나 맛이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매머드 성체의 경우 무게는 8∼10t에 달한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고기를 사냥해서 장기간 먹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당시는 빙하기여서 한 번 잡은 고기는 심지어 몇 달간 보관할 수도 있었다. 다만, 매머드와 같은 거대한 포유류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함께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한 사회의 구성원은 증가해야 했고, 매머드와 함께 다산을 바라는 희망이 여신상으로 반영되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니 매머드의 사냥이 최초의 여신 탄생에 기여한 셈이다.
매머드를 사냥하던 후기 구석기시대는 아주 추운 빙하기여서 동굴 안에 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당시 사람들은 현재 우리와 전혀 차이가 없는 사피엔스였기에 흐릿한 모닥불가에서 벽화와 조각상 같은 예술품을 남겼다. 그들의 미적 감각은 우리와 전혀 차이가 없었으므로 그들이 만들어 낸 여신상은 가장 아름답게 생각하던, 이상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조각에서 표현된 여신들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여신들과 달리 비만형의 체형이다. 당시는 빙하기라 피하지방이 많이 쌓여야 생존 및 육아와 출산에 더 유리했기 때문에 이런 비만한 모습을 선호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모든 아름다움의 기반에는 생존과 번식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재확인시켜 주는 셈이다.
여신 달력, 스타 달력의 시초?
구석기시대의 비너스는 아직 한국에는 없지만 시베리아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대부분 매머드 뼈로 만든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바이칼 호수 근처 부레티의 2만 년 전 유적에서 발견된 것이 유명하다. 이 여신상은 ‘말타의 비너스’라 불리는데 후기 구석기시대 바이칼 지역을 대표하는 ‘말타 문화’에서 따온 것이다. 바이칼 근처에서도 유럽과 비슷하게 둔부와 가슴이 과도하게 강조된 여신상이 자주 발견된다. 그런데 이 바이칼 호수의 비너스 중 하나는 특이하게도 제법 둔부가 강조되었지만 유럽에 비해서는 비교도 안 되게 날씬한(?) 편이다. 이 날씬한 비너스의 몸에는 반달 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얼핏 보면 온몸을 패딩 외투로 덮은 모습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새로운 주장도 있으니, 러시아의 저명한 천문고고학자인 비탈리 라리체프는 이를 두고 ‘달력’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바로 몸에 새겨진 반달 모양의 형태가 서로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달의 이지러짐을 순차적으로 표현했다고 본 것이다. 추운 빙하기에 동굴 속에 살려면 날씨의 변화를 파악하는 것은 다산만큼이나 중요했을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태양은 남성을 상징하고 달은 주로 여성을 상징해 왔다. 그러한 생각이 말타의 여신 달력에 반영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지금도 우리는 좋아하는 연예인의 브로마이드를 달력으로 만드는 것이 인기이니, 어쩌면 연예인의 달력도 그 역사가 구석기시대로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출산과 양육의 숭고함 예찬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넘어가는 사회는 모계사회로 그 어느 시대보다 다산과 육아를 상징하는 여신상이 많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쉽게도 빙하기 시대의 여인상은 발견된 적이 없다. 그나마 가장 빠른 것으로 50년 전에 울산 울주군 서생면의 신암리 패총에서 발굴된 진흙으로 만든 여신상이 있다. 함께 나온 유물로 볼 때 대략 6000년 전이라고 생각된다. 북한 함경북도 두만강 하구에 위치한 서포항이라는 유적지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여신상은 얼굴과 사지는 없지만 남아 있는 모습으로 볼 때 가슴과 둔부가 도드라지게 강조된 것이다. 얼마 없지만 한국도 다산을 기원하는 구석기시대의 전통이 고스란히 이어진 것은 분명하다. 둘 다 얼굴과 사지가 없으니 아마 직물이나 나무 같은 것으로 얼굴과 손을 만들어서 따로 붙였을 것이다.
선사시대에는 젊거나 임신한 상태, 가임기의 젊은 여성만을 숭앙하지 않았다. 이미 임신하기 어려운 중년이나 노년의 여신을 숭앙하기도 했다. 인류 최초의 마을로 일컬어지는 튀르키예의 차탈회위크에서는 다수의 여신상이 발견되었는데, 그 신체적인 특징은 가임기가 훨씬 지난 중년 이후의 모습이다. 제주도 설문대할망 신화나 러시아의 바바 야가처럼 여신은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닌 할머니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모습은 인간의 진화를 생각하면 결코 낯설지 않다. 사실 출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양육이다. 사피엔스는 태어난 직후 다양한 질병을 이겨내며 10년 가까이 사회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시간을 거쳐야 한다. 인류가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지식의 전달이었다. 아이를 키우고 지혜를 가르쳐주는 할머니의 모습이 소중한 이유이다.
고고학이 전하는 진정한 여신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서 후대를 키우고 교육하는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의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힘든 출산과 육아에 전력을 다하는 여성들이 21세기 우리 시대의 진정한 여신이 아닐까. 거의 국가 멸망 수준의 출산율 저하로 한국의 미래는 무척 암울하다. 다산을 기원하는 석기시대 고대의 여신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너무나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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