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임수]‘국민 재테크’에서 ‘국민 재앙’ 된 ELS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22일 23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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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실률 60% 홍콩 ELS에 투자자 집단행동
불완전판매 여부 철저히 따져 책임 물어야

정임수 논설위원
정임수 논설위원
안타깝게도, 혹시나 했던 수익률 반전은 없었다. 새해 들어 만기가 돌아온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에서 대규모 원금 손실이 현실화하고 있다. 2주 동안 5대 은행에서 발생한 손실액은 2300억 원에 육박한다. 평균 수익률 ―52.7%로 투자금 절반 이상을 날렸다는 얘기다. 올 상반기에만 10조2000억 원어치의 홍콩H지수 ELS 만기가 닥치는데, 지금 추세라면 원금 손실액은 6조 원을 넘어설 것으로 우려된다. 사정없이 터지는 손실 폭탄에 투자자들은 패닉에 빠졌다.

ELS는 통상 3년인 만기 때까지 기초자산으로 삼는 주가지수나 특정 종목 주가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 않으면 약정한 수익을 보장하는 일종의 파생상품이다. 2003년 처음 선을 보인 뒤 은행 예금 금리보다 2∼3배 높은 수익률을 내걸면서 저금리 시대 ‘국민 재테크’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기초자산 가격이 일정 수준 아래로 내려가면 100% 손실도 각오해야 한다. 손실 확률이 비교적 낮지만 한번 깨지면 크게 깨지는 초고위험 상품인데도, 한국에선 ‘중위험 중수익’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지금 문제가 되는 홍콩H지수 ELS도 약정 수익률을 받으려면 지수가 3년 전 가입 때보다 65% 이상은 돼야 한다. 65% 밑으로 떨어지면 하락 폭만큼 원금 손실이 발생한다. 2021년 상반기 10,000∼12,000대를 오르내리던 홍콩H지수는 현재 반 토막도 안 되는 5,000 문턱까지 주저앉았다. 중국 부동산 경기 침체와 소비 부진 여파로 올 들어 하락세는 더 가파르다. ELS 손실률이 60%를 넘어서는 건 시간 문제다.

눈덩이 손실이 본격화되자 투자자들은 집단행동에 나섰다. ELS 가입자 모임은 19일 금융감독원 앞에서 집회를 열고 “원금 손실 가능성에 대해 설명 듣지 못했다”며 “불완전판매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은행 직원들이 “중국이 망하지 않는 한 손실 날 일이 없다” “금리가 훨씬 높고 안전하다”며 가입을 권했다는 게 투자자들의 주장이다.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으로 불완전판매 요소를 점검하는 이중삼중 장치가 생겼지만 65세 이상 고령층의 ELS 투자액이 전체 개인 투자액의 30%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금융사들이 이를 요식적으로 지켰을 가능성이 높다. ELS 가입에 필요한 투자성향서 작성이나 서명을 은행 직원이 대신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금감원이 앞서 벌인 사전 점검에선 일부 은행이 직원 인사 평가에서 ELS 판매 실적을 높은 비중으로 반영해 사실상 판매를 부추겼다는 정황이 확인됐다. ELS 판매 한도를 임의로 늘린 사실도 드러났다.

ELS발 대형 손실 위기는 처음이 아니다. 2008년, 2015년, 2020년 등 수차례 원금 손실 공포를 안겼는데도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건 모럴해저드에 빠진 금융회사 못지않게 금융당국의 책임도 작지 않다. 문제가 불거지고 나서야 대응에 나서는 감독당국의 뒷북 행태는 그대로다. 2019년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손실 사태 이후 금융당국은 개별 종목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ELS 판매를 금지하면서도 H지수를 포함한 지수형 ELS 판매는 허용했다. 은행들이 홍콩H지수 ELS를 판매하도록 판을 깔아준 셈이다. 이번 기회에 은행의 고위험 투자 상품 판매가 적합한지 따져 봐야 한다.

감독당국이 ELS 판매 은행과 증권사에 대한 현장 검사에 착수한 만큼 철저하게 진상을 밝혀 금융사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일반적 투자 실패와 불완전판매로 인한 피해를 명확히 가려내는 작업도 필요하다. ELS 같은 고위험 상품에 여러 차례 투자해 수익을 챙겨놓고 손실이 날 때에만 판매사에 책임을 돌리는 이들까지 무작정 보호하는 건 곤란하다. 이번 사태 수습에서도 투자자 보호는 엄격하되, 총선을 앞두고 금융 포퓰리즘에 휘둘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국민 재테크#국민 재앙#els#투자자 집단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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