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센강의 한 다리 아래에서 만난 서아프리카 기니 출신의 노숙인 아부다카 씨의 말이다. 강변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낡은 텐트 20여 개 중에 그의 텐트가 있었다. 아부다카 씨는 “추운 날씨에 우릴 도와줄 구호대를 기다리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텐트 위에는 방한용으로 보이는 낡은 담요도 있었지만 강추위를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올 1월 파리 날씨는 예년에 비해 훨씬 추웠다. 예보에 없던 폭설도 종종 쏟아졌다. 이날도 많은 노숙인들이 시청 등 도심 곳곳의 온풍이 나오는 하수구 주변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주변 무료 급식소에서 식사를 하고 오는 짧은 시간 동안 온풍이 가까운 ‘명당’을 뺏기지 않으려고 낡은 매트리스와 옷가지를 가득 쌓아둔 사람도 있었다.》
지난해 1월 파리의 기온은 10도 안팎을 보이는 날이 있을 만큼 따뜻했다. 같은 해 연말에도 포근한 날씨가 계속됐다. 하지만 올 들어 갑자기 북유럽과 러시아의 찬 공기가 하강하며 기온이 10도가량 뚝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기상 이변에 당국은 노숙인을 보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예기치 않은 혹한과 폭설로 얼어 숨지는 노숙인이 상당수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에 일부 노숙인을 저소득층이 저렴하게 거주하는 사회 주택, 노숙인을 위한 임시 숙소 등으로 이주시키고 있다. 이와 별도로 호텔, 학교, 체육관 등에 긴급 임시 숙소 274곳도 만드는 등 부랴부랴 대비책을 내놓고 있다.
이민자 증가→노숙인 급증
프랑스는 노숙인이 많은 나라로 유명하다. 주요 대도시의 지하철역 주변은 물론이고 주택가나 교회 앞에서도 노숙인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주택부에 따르면 임시 숙소 등 건물에서 밤을 보내는 노숙인만 최소 20만 명으로 추산된다. 노숙인 지원단체 ‘아베피에르’ 재단 역시 2022년 프랑스 전체의 노숙인을 약 33만 명으로 추산했다. 10년 전보다 약 2배 증가했다.
노숙인의 상당수는 파리와 그 주변 지역을 일컫는 일드프랑스주(州)에 거주한다. 이곳에 구호 단체와 무료 급식소가 많고 단순 일자리 또한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노숙인이 늘면서 최근에는 노숙인의 사망이 사회 문제로 대두했다. 르피가로 등에 따르면 2022년에만 624명의 노숙인이 숨졌다. 또 다른 노숙인 지원단체 ‘거리의죽음’에 따르면 사망자 5명 중 1명은 폭행, 사고, 자살로 숨졌다. 또 7명 중 1명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미성년 노숙인도 빠르게 늘고 있다. 현지 매체 ‘웨스트프랑스’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15일 기준 7572명이 긴급 숙소를 찾지 못해 응급 번호로 당국에 신고했다. 이 가운데 약 3분의 1이 18세 미만이었다. 레아 필로슈 파리 부시장은 이를 두고 “전례가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일부 공립학교 학부모 단체는 ‘학생을 학교로’ ‘길 위의 아이들을 구하자’는 슬로건을 걸고 미성년 노숙인 구호 활동을 시작했다.
노숙인 급증은 이민자 증가와도 관련이 깊다. 통계청(INSEE)에 따르면 2021년 프랑스 거주자의 10분의 1인 약 700만 명이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태어나 프랑스에 왔다”고 답한 이민자였다. 53년 전인 1968년엔 프랑스 거주자의 6.5%만 “해외에서 왔다”고 했다. 또한 2021년 기준 이민자의 3분의 1 정도만 시민권을 갖고 있다. 나머지 3분의 2는 시민권이 없어 직업을 구하기 어렵고 생계 또한 위험에 처하기 쉽다는 뜻이다.
노숙인용 숙소도 부족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계속된 고물가, 높은 주거 비용 등도 노숙인 증가를 부추기고 있다.
과거 거처가 없는 이들은 친척, 지인의 신세를 질 때가 많았다. 생활비가 천정부지로 치솟은 지금은 다들 자신의 생계 해결도 어려워 남을 도와주기 힘들어졌다. 웨스트프랑스는 “고물가가 재정적으로 취약한 가정에 타격을 주고 있다. 친척으로부터 집을 구했던 가족이 강제로 거리로 나앉고 있다”고 전했다.
거처를 원하는 이는 많은데 사회 주택, 임시 주택 등은 줄어 노숙인 위기를 더 키우고 있다. 자선단체 ‘연대행위자연맹’에 따르면 2022년 일드프랑스주에 있는 호텔의 임시 공간에서 생활한 노숙인만 약 5만 명이었다.
하지만 그간 노숙인에게 임시 숙소를 제공했던 상당수 호텔은 7월 개막하는 2024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유료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기존에 정부와 체결했던 임시 주택 계약을 속속 취소하고 있다. 최소 5000곳이 계약을 취소했다고 미 CNN은 전했다. 남서부 지롱드주 보르도 당국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가에 정박된 유람선을 노숙인 숙소로 리모델링했다.
파리 마레지구 근처에서 만난 노숙인 마리오 씨는 “이곳에서 15년째 노숙하고 있다. 이민자가 워낙 많아 사회 주택에는 좀처럼 입소하기 어렵다”고 했다. 간혹 자리가 생겼을 때도 자신은 개를 데리고 있다는 이유로 입소를 거부당한다고 토로했다.
중앙정부 vs 지방정부 갈등도
파리 올림픽을 앞둔 당국이 일부 노숙인을 파리 외곽으로 이주시키고 있는 것도 논란이다. 유로뉴스 등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해 4월부터 수개월간 노숙인들을 파리 밖 다른 10개 지역으로 옮겼다. 이를 통해 약 1800명이 강제로 파리를 떠났다. 대부분 이민자들이다.
파리 올림픽조직위원회 측은 CNN에 “노숙인 이주 작업은 올림픽과 무관하다”고 밝혔지만 적지 않은 시민들은 당국의 처사를 비판하고 있다. 최근 시민단체 60여 곳은 “정부가 사회 정화에라도 나선 것이냐”고 비난했다. 올림픽을 찾는 각국 주요 인사와 관광객에게 파리의 화사한 면만 보여주기 위해 인위적인 미화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와 일부 지방정부의 갈등 또한 불거졌다. 중앙정부는 지난해 5월 성명을 통해 “지방 선출직 공무원 및 협회와 협의해 노숙인센터를 건립하도록 각 지역에 요청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노숙인들을 강제로 할당받은 리옹, 보르도 등에선 “중앙정부와 협의한 적이 없다”고 반발했다. 상드린 뤼넬 리옹 부시장은 CNN에 “지역의 수용 능력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사람들을 보내고 있다”며 중앙정부의 일방적인 처사를 비판했다.
일부 노숙인은 오염 지역으로 보내져 안전 우려도 제기된다. 또 다른 현지 매체 르텔레그램에 따르면 북서부의 소도시 브뤼즈에서는 경찰청 주도로 노숙인 임시 숙소가 마련됐다. 그러나 필리프 살몽 시장은 중금속으로 오염된 자리에 숙소가 들어선다며 “우리와 이 문제를 협의하지 않았다. 화가 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모두 노숙인들을 이리저리 재배치하기에만 바쁠 뿐 지속 가능한 대책에는 관심이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노숙인 지원단체 ‘유토피아56’의 얀 망지 설립자는 “각 지역의 노숙인 보호소에서도 3주 정도만 묵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보호소에 온 노숙인의 25∼30%는 다시 거리로 돌아가야 하는 신세라며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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