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활개치게 한 품, 골목길[공간의 재발견/정성갑]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25일 23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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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초를 지나며 넷플릭스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다시 봤다. 새로운 영화나 드라마도 좋지만 어떨 때는 이미 봤던 것들에 더 끌린다. 좋아하는 사진첩을 오랜만에 다시 펼쳐 보는 것처럼 익숙하고 편안하며 설레기도 한 기분. 시간이 흐르면서 내용도 거의 까먹어서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운 장면도 많다. 오랜만에 다시 본 드라마는 하, 명작이었다. 쌍문동 봉황당 골목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정환이, 덕선이, 선우, 택이 그리고 동룡이네 이야기. 88 서울 올림픽이 열렸고, 경주로 가는 수학여행이 있었고, 은행 정기예금 이자율이 15%에 이르고(그런 시절이 있었다니), 신해철이 이끄는 무한궤도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탔던. 35년 후에 2024년을 되돌아보면 또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있겠지만 그때 그 시절은 왜 이렇게 재미있고 사람 냄새 나고 즐겁고 요란해 보이는지. 쌍문동 치타 라미란이 전국노래자랑 예선에서 현란한 춤사위를 선보이고, 성동일이 좋은 일이건 슬픈 일이건 “아따 염병을 허네” 목소리를 높이고, 자식들 뒷바라지가 삶의 이유 같았던 부모들의 모습은 웃음과 눈물, 정과 한이 뒤범벅된 그리움과 뭉클함, 그 자체였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이 많은 이야기의 무대는 골목길이다. 아침이면 돌아가며 빗질하고, 덕선이와 택이, 선우와 보라가 가로등 아래 몰래 데이트를 하고, 쌍문동 엄마 3인방이 평상에서 반찬거리를 손질하며 한 번씩 키득키득 야한 이야기도 하는. 골목길이 있어 비로소 왁자지껄 소란스럽고 정겨운 ‘인간극장’이 만들어진달까? 골목길이 없었다면 그 시절의 많은 기억은 백 번을 얘기해도 여전히 재미있는 추억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동네 안을 연결하는 그 좁은 길은 기꺼이 만만한 세상도 되어 준다.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푹 놓이고, 고만고만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한 번쯤 골목대장도 할 수 있는. 뭣도 모르던 나이의 나도 골목길에서만큼은 한껏 당당했던 것 같다.

내가 94학번. 드라마 속 그 시절과 겹치는 유년기와 학창 시절의 추억이 많다. 나 역시 동네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딱지치기를 하고, 말타기를 했다.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선일이, 태공이, 경아네 집. 무르팍 깨져가며 자전거도 그곳에서 배웠다. 그런 나를 보고 ‘아부지’가 했던 말이 있다. “고삐 풀린 망아지 새끼처럼 잘 노는구나.” 그리 잘나지 않았음에도 마냥 움츠러들지만은 않고 나름의 자신감으로 이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은 활개를 치고 다녔던 그때 그 시절, 골목의 시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첫 키스도 어느 골목길 안에서였네. ‘응답하라 1988’ 20화를 정주행하고 나서 나와 우리들의 골목길을 떠올린다.

#응답하라 1988#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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