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과거 이야기 한 토막부터. 2009년 경기 과천의 정부 부처를 출입할 때였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경쟁국 기업이 입찰에서 뒷돈을 건넨다. 마지막 단계에서 수출을 번번이 놓친다. 카이(KAI·한국항공우주산업)를 민영화하든가 해야지…”라고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시 KAI는 8조 원 이상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사실상 공기업이었다.
정부는 KAI가 개발한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을 수출하려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수출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특히 경쟁사들은 번번이 검은돈을 뿌렸다. 설령 KAI가 민영화되더라도 입찰 때 검은돈으로 로비를 할 순 없을 것이다. 다만 T-50 수출에 대한 당국자의 강한 애착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은돈 말고 합법적으로 지원하는 길도 많다. 그중 하나는 구매국에 돈을 빌려 주는 것이다. 세계 방위산업 시장의 가장 큰손, 미국도 방위장비 수출에서 대출의 중요성을 절감한 때가 있었다. 2000년 전후 헝가리, 체코, 폴란드가 잇달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면서 새 전투기를 구매했다. 미국 기업 등이 입찰에 참가했다. 헝가리는 2001년 9월 미국 대신 스웨덴 기업과 전투기 14기에 대한 구매 계약을 맺었다. 미국 정부는 1억 달러(약 1300억 원) 차관을 약속했지만, 스웨덴은 구매 비용 100%에 대한 금융지원을 해주겠다고 공약했다. 같은 해 12월 체코도 미국 대신 스웨덴 기업과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폴란드 입찰에서 전투기 구매 금액 100% 대출을 약속했다. 결국 미국 기업은 2002년 10월 폴란드로부터 F-16 전투기 48기 계약을 따내게 된다. 미국 정부는 지금도 대규모 금융지원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 정부 역시 수출입은행 등을 통해 금융지원을 한다. 폴란드가 2022년 8월 KAI의 FA-50 전투기 등 17조 원어치를 구매하는 1차 계약을 맺었을 때 수은은 6조 원을 폴란드 정부에 빌려줬다.
폴란드 정부는 그 후로도 추가 계약을 통해 30조 원 이상의 한국산 무기를 구매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수은법상 수은은 동일한 대출자에 대해 자기자본(18조 원)의 40%(7조2000억 원) 이상을 대출할 수 없다. 폴란드와의 1차 계약에서 6조 원을 대출해 줬기에 추가 대출을 해 줄 여력이 거의 없는 것이다. 수은의 대출이 막히자 한국 방산 기업들은 작년에 끝냈어야 할 2차 계약을 아직도 제대로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다.
해결책은 있다. 수은법을 개정해 수은의 자본금을 늘리면 된다. 이미 여야는 현재 15조 원인 수은의 자본금을 25조∼35조 원으로 상향하는 법안을 여럿 제출했다. 자본금을 늘려 놓으면 향후 사우디아라비아 네옴시티 건설 사업, 우크라이나 전후 재건 사업 등에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11월 국회 기획재정위 경제재정소위에 개정안이 올라온 뒤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4월 총선에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새해 들어 동유럽, 중동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전쟁에 승자는 없다지만 방위산업은 예외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해 상반기 세계 주요 방산 기업 15곳의 수주액이 7640억 달러로 2022년 연간 수주액(7776억 달러)과 맞먹는다고 보도했다. 폴란드와 예정된 추가 계약액 약 30조 원은 저출생 극복을 위해 매년 투입하는 재정 혹은 작년 국가 연구개발(R&D) 예산과 동일한 규모다. 그 돈을 이대로 날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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