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살하지 않고 살기 위해 신을 생각해 낸 것이다. 이때까지의 세계사는 바로 이것에 불과한 거야.’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악령’ 중
스물두 살에 이 문장을 접했다. 이철 한국외국어대 교수가 번역한 범우사판 ‘악령’ 하권에서였다. 이후 25년 넘게 이 두 문장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도 심한 과장은 아니다. 열린책들판에서 박혜경 한림대 교수는 같은 대목을 ‘인간이 한 일이라고는 자살하지 않고 살기 위해 신을 고안해 낸 것뿐이지. 지금까지 전 세계 역사가 그랬어’라고 옮겼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이 대사는 키릴로프라는 인물이 한다. 그는 무신론자이자 허무주의자로, 객기나 냉소가 아니라 진지한 고찰 끝에 저렇게 말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같은 사상을 지닌 인물을 몇 명 더 창조했는데, ‘죄와 벌’의 스비드리가일로프,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이반 카라마조프 등이다. 그중에서도 ‘악령’의 키릴로프는 자기 신념을 가장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자신에게 자살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무서운 결론을 내리고 그걸 실천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도스토옙스키가 무신론을 반박하기 위해 창조한 캐릭터가 후대의 무신론자들에게 큰 영감을 줬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예를 들어 알베르 카뮈의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는 한 챕터의 제목이 ‘키릴로프’다. 카뮈가 이 책 전체에서 다루는 문제도 바로 키릴로프가 매달렸던 그 질문이다. 인간은 왜 자살하지 않고 살아야 하는가? 신 외에 어떤 다른 대답을 댈 수 있는가?
나는 나대로 거기에 답해보려고 애쓰지만 여전히 막연하다. 저 두 문장에서 시작한 소설을 써보기도 했다. 살 이유가 없다며 연쇄 자살을 벌이는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나, 신 대신 다른 윤리의 기반을 발명하려는 살인자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 아마 앞으로도 몇 편 더 쓰게 될 것 같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으려는 노력 없이 살 수 있는 삶이 가끔은 부럽기도 하다. 동시에, 그 노력이 불러일으키는 긴장 상태가 일종의 축복이라는 생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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