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병’ 감독이 코딩 삼매경에 빠진 이유 [광화문에서/황규인]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28일 23시 42분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프로 스포츠 지도자들이 ‘짤리면’ 보통 해외 연수를 간다. ‘부족한 걸 채우고 돌아오겠다’고들 하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사실상 ‘구경꾼’으로 생활하고 돌아오는 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경질 과정에서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할 시공간이 필요하다”는 게 좀 더 솔직한 이유 아닐까. 말하자면 ‘명장병’ 치유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프로배구에서 가장 심한 명장병 환자는 최태웅 전 현대캐피탈 감독이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찾아보면 그에게 명장병 진단을 처음 내린 기사는 황규인 기자 그러니까 이 ‘광화문에서’를 쓰고 있는 사람이 썼다. 그만큼 그의 명장병을 잘 안다고 자부한다. 지난해 12월 21일 경질당한 뒤 한 달 넘게 칩거하던 그를 최근 만나 명장병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지 물었다.

워낙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일만 골라 한다는 걸 알기에 해외 연수 이야기는 꺼내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렇다고 “코딩 공부를 하고 있다”고 답할 줄은 몰랐다. 최 전 감독은 “사실 팀에 있을 때도 틈틈이 코딩 공부를 했다. 시간이 났으니 코딩을 제대로 배워 배구 작전 구상에 제대로 활용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최 전 감독이 2015년 부임 이후 중학교 수학 문제집을 풀던 생각이 났다. 당시 그는 “수학을 다시 해두면 데이터 분석에 혹시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면서 “부끄럽고 쑥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마침 수학을 잘하는 프런트 직원이 있어서 그 직원을 열심히 괴롭히면서 배우고 있다”며 웃었었다.

최 전 감독은 이런 공부를 바탕으로 남들과 다른 선택을 내리기 시작했다. 다른 팀은 다 한 명인 수비 전문 포지션 리베로 자리에 굳이 두 명을 쓴다거나, ‘원포인트 서브 전문 선수’를 따로 키워 세트마다 마무리 투수처럼 기용하는 식이었다. 재미있는 건 이런 전술이 이제는 프로배구에서 ‘뉴 노멀’이 됐다는 점이다. 그만큼 이런 전술이 잘 통했다. 최 전 감독은 ‘만년 2위 팀’ 현대캐피탈에 두 차례 우승 트로피를 선물했다.

문제는 남들이 하지 않는 것에만 너무 매달렸던 게 결국 독이 됐다는 거다. 그 바람에 ‘세상에는 이미 잘린 감독과 앞으로 잘릴 감독만 있다’는 프로 스포츠 세계 논리를 비켜 가지 못했다. 지난 시즌 준우승팀 현대캐피탈이 시즌 반환점을 앞두고 ‘뒤에서 2등’을 하고 있다는 건 잘리고도 남을 이유였다. 최 전 감독 체제에서 4승(13패)에 그쳤던 현대캐피탈은 그가 지휘봉을 내려놓은 바로 다음 경기부터 5연승을 내달렸다. 이런 결과와 최 전 감독의 명장병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스포츠를 10년 넘게 취재하면서 느낀 게 있다. 명장병에 걸린 모든 지도자가 명장이 되는 건 아니지만 명장 반열에 오른 지도자에게는 모두 명장병 증상이 있다는 점이다. 그 증상을 잘 다스리면 명장이 되지만 그러지 못하면 그냥 명장병 환자로 남는다. 코딩 공부가 최 전 감독의 명장병을 ‘관리 가능한 질병’으로 바꿔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명장병#감독#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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