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과 한미 관계의 교훈 [광화문에서/김상운]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29일 23시 42분


김상운 문화부 차장
김상운 문화부 차장
최근 영화 ‘서울의 봄’을 같이 본 고등학생 아들이 “12·12쿠데타를 왜 막지 못했는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답답해했다. 많은 관객들이 같은 걸 물었을 것이다. 일각에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던 미국이 쿠데타를 막을 의사가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쿠데타 발생의 근본 원인은 대개 체제 내부에 있다. 12·12 당시 미국의 움직임을 돌아보는 건 철 지난 반미주의의 변주가 아니다. 이보다는 혈맹에 비견되는 한미 관계 역시 명분과 실리의 줄다리기라는 외교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존 위컴 전 주한미군사령관의 1999년 회고록에 따르면 1979년 12월 12일 밤 노재현 당시 국방부 장관이 미 8군 벙커로 피신해 위컴과 함께 있었다. 한국군과 주한미군 최고 지휘부가 공교롭게 한자리에 있었던 것. 이날 반란군 진압에 나선 장태완 수도방위사령관이 상부에 요청한 수도기계화사단과 26보병사단은 위컴의 작전통제권 아래 있는 병력이었다.

그런데 위컴은 “아직 어둡기 때문에 진압군과 반란군 간 오인 충돌이 불가피하다”며 노 장관에게 부대 이동을 허가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노태우가 전방의 9사단을 무리하게 서울로 진입시킨 상황에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건 미국이 애초부터 신군부를 진압할 의사가 없었음을 보여 준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은 결정적 순간에 왜 반란군 진압을 만류했을까. 이에 대해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회고록에서 “12일 밤과 13일 새벽 북한을 자극할 한국군 간의 충돌과, 민간 정부가 전복돼 한국의 정치적 자유가 무산되는 것 두 가지를 방지하는 데 우선순위를 뒀다. 그러나 둘 중에서도 전자를 특별히 경계했다”고 썼다. 민주정 붕괴보다 남한 군부의 내전을 틈탄 북한군의 남침 방지에 주력했다는 얘기다. 미국이 도덕외교에서 강조하는 ‘민주 가치’를 포기하고 ‘안보 이익’을 택한 셈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지미 카터 행정부는 역대 어느 미국 대통령보다 도덕주의 외교를 내세웠다는 점이다. 카터는 1977년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동맹국이라도 인권을 탄압하는 권위주의 정부를 옹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미국은 1979년 카터 방한을 앞두고 주한미군 철수를 지렛대로 6개월간 양심수 180명을 석방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약속을 받아냈다.

워싱턴의 이런 분위기는 10·26사태 직후 발생한 1979년 11월 ‘이란 인질 사태’로 급변했다. 중동에서 주요 동맹을 잃은 상황에서 동아시아에서 공산 진영에 맞서는 한미 동맹마저 위태롭게 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 그해 12월 소련의 아프간 침공도 한몫했다.

그렇다고 미국이 역대 한미 관계를 국익으로만 접근한 건 아니다. 1950년대 전략적 이익이 크지 않았던 한반도에서 미국이 약 14만 명의 자국민을 희생시키며 6·25전쟁에 개입한 것은 공산권의 침략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도덕주의 외교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대한민국 안보의 핵심 축인 한미 동맹의 이면에 도덕주의와 현실주의 외교가 병존함을 직시하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게 12·12의 교훈 아닐까.

#서울의 봄#한미 관계#12·12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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