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8년 초 일본에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에도에서는 미국 총영사 타운센드 해리스가 막부에 통상조약 체결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반대 여론을 무마하고자 막부 쇼군은 로주(老中·총리) 홋타 마사요시(堀田正睦)를, 그동안 정치에는 간여하지 않던 교토의 천황에게 보내 칙허를 얻으려 했다. 도쿠가와 시대 내내 천황은 막부의 명령에 순종해 왔으니, 이번에도 간단히 일을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고메이(孝明) 천황이 이를 보기 좋게 거절한 것이다.》
천황, 막부의 조약 칙허 요구 거절
천하가 이를 목도했고, 그 충격에 따라 정치 지형이 급속히 바뀌었다. 철옹성 같던 막부의 권위에 생채기가 생겼고, 철벽처럼 보였던 조정-막부 관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둘이 대립할 수도 있음을, 나아가 이 작지만 충격적인 균열이 엄청난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눈치 챈 세력들이 감춰뒀던 발톱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원래 도쿠가와 시대의 조정과 천황은 정치·군사·경제적으로 막부와는 비교가 안 되는 미약한 존재였다. 외교를 비롯하여 모든 정무는 막부가 전담했으며, 조정(천황)은 막부의 경제 원조를 받아야 체통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존호(尊號) 사건 같은 막부에 대한 자그만 도전도 없지 않았지만 늘 조정 측의 완패로 끝나고 말았다.
상황이 이랬으니 막부가 가벼운 생각으로 홋타를 교토에 보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감히 천황이 막부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천황 궁궐이나 천황 친척의 일 같은 문제도 아니고 미국과의 조약 체결이라는 정무적 일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 없었다. 그런데도 막부뿐 아니라 만인의 예상을 깨고 고메이 천황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간 일본사에서는 ‘막부의 통상조약 칙허 요구를 고메이 천황이 거절해서 막부는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는 식으로만 서술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의아한 일이다. 250여 년간 막부에 찍소리도 못 하던 천황이 어떻게 이렇게 중차대한 시점에 반기를 드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간 교토의 조정 내에서는 어떤 일들이 전개되어 온 것일까.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수면으로 올라온 것이 1858년 초의 사태가 아니었을까.
역사서 학습, 군주의식 배양
다행히 최근의 연구들로 이런 의문들이 많이 해소되었다. 짐작대로 조정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드라마처럼 생긴 일은 아니었다. 멀리는 18세기 말부터 늦어도 19세기에 들어서 천황과 조정은 자신이 일본의 치자(治者)라는 ‘군주 의식’에 눈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김형진, ‘도쿠가와 후기 조정의 부상과 학문의 역할’·‘막말 조정의 학습원과 공가사회의 정치화’). 1780년부터 재위하던 고카쿠(光格) 천황은 ‘효경’ 같은 기초교육을 넘어 ‘십팔사략’ ‘정관정요’ 같은 역사나 통치 이념과 관련된 사서를 학습했다. 이것들은 자칫 천황의 정치적 각성을 초래할 수도 있는 책들이었다. 비슷한 시기 고사쿠라마치상황(後櫻町上皇)도 ‘논어’ ‘맹자’ ‘상서(尙書)’ ‘예기’ 같은 경서와 ‘정관정요’ 같은 제왕학, ‘좌전’ 같은 사서를 공부하는 학습회를 수십 년간 계속했는데, 여기에는 20여 명의 공가(公家·조정 신하)도 참여했다. 이 무렵 봄·가을에 농민이 상황의 궁궐(仙洞御所)에 들어와 모내기와 수확하는 시범을 보이고, 이것을 천황이 관람하는 의식이 연중행사로 정착되었다. 이는 동아시아 군주들의 친경(親耕·왕이 농업 장려에 솔선하는 뜻으로 적전에 나가 몸소 갈고 씨 뿌리는 의식)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천황의 ‘군주 의식’ 배양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형진은 닌코(仁孝) 천황(재위 1817∼1846년) 때가 되면 역사서 강독은 정례화되었고, 운영 방식, 커리큘럼도 체계화되어 가는 것을 발견했다. 지금까지는 거의 중국 사서를 읽는 한어회(漢御會)만 있었던 데 비해, 1830년대 중반에는 일본 사서를 강독하는 화어회(和御會)도 곧잘 개최되었다. 여기서는 ‘일본서기’ ‘속일본기’ ‘일본 후기’ 등 일본 정사인 육국사(六國史) 학습이 이뤄졌다. 치자 의식과 함께 자국의 역사에 대한 인식도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닌코 천황기의 학습회에는 더 많은 공경들이 참석했고, 때로는 황족도 들어왔다. 이런 분위기는 마침내 공가를 위한 교육기관 설립 움직임을 불러일으켜 1847년 학습원의 창설이 실현되었다. 이를 통해 천황과 자리를 함께할 수 있는 상급 공경뿐 아니라 다수의 하급 공가들도 경서, 사서 학습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학적(學的) 네트워크’가 형성되게 되었다.
천황-신하, 토론 통해 정치적 각성
주목할 것은 회독(會讀)이라는 학습 방법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회독은 참가자들이 같은 텍스트를 읽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해석하는 공부 방식이다. 해석이 끝나면 각각 질문과 대답, 토론 등이 활발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각자가 텍스트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갖지 않으면 견뎌내기 힘든 공부 방법이었다. 필자가 연구한 사무라이들의 회독에서는 이 토론이 곧잘 정치비평으로까지 이어지곤 해 사무라이들의 정치화에 중요한 촉매 역할을 했다. 천황과 공가의 회독에서 민감한 정치문제가 얼마나 언급되었을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그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정치적 각성’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도쿠가와 후기의 천황들은 강렬한 ‘군주 의식’ 내지 ‘황통 의식’을 갖게 되었고(藤田覚, ‘江戸時代の天皇’), 공가들도 일본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새로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막부와 사무라이들이 천황과 공가들을 ‘긴소매(長袖) 입은, 유약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업신여기며 자만에 들떠 있는 사이, 교토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변하고 있었다. 막부가 통상조약 칙허를 얻기 위해 홋타 마사요시를 파견했던 1858년 고메이 천황은 재위 12년째를 맞는 37세 청년 군주였다. 이상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고 학습해 온 이 젊은 천황과 공가들이 개항이라는 국가의 대위기를 맞아 독자적인 정치 행보를 보인 것은, 이렇게 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눈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오래 쌓여온 변화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 세상이 경악하는 일은 역사에서 드물지 않다. 평소 눈여겨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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