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고용률에도 청년 일자리 정책 안 보여
정책 결정자들 이해 걸린 정년 연장 논의만
“내가 방패 되어 주마” 나설 지도자 없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장편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년)의 주인공 나우시카는 바람계곡에 있는 작은 왕국의 공주다. 어느 날 제국의 군대가 계곡에 쳐들어와 왕을 살해했다. 부왕의 죽음을 목도한 나우시카는 분노로 이성을 잃고 제국군과 싸운다. 제국 철갑병의 도끼와 나우시카의 검이 서로를 노리고 돌격할 때, 나우시카의 스승인 유파가 그 둘을 막아섰다. 오른손에 든 단검으로 철갑병의 목줄을 위협하고 왼 팔뚝으로 나우시카의 검을 막은 유파가 나우시카에게 말한다. “살아남아라. 살아남아서 기회를 기다려라.”
침략군에게 부왕을 잃은 소왕국의 공주라면 차라리 그 자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유파는 왜 공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을까? 친구의 딸을 살리려는 본능이 우선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회를 기다리라는 그의 당부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엿보인다. 인생의 무수한 희로애락을 경험한 장년의 유파에게는 절망이 희망으로,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이 몇 번이고 있었을 것이다. 미래의 희망인 나우시카를 지키기 위해 그는 피를 흘리며 검을 막았다.
졸업 시즌인 2월이 되었다. 한국 20대의 고용률이 너무 낮기 때문에, 취업에 실패해 졸업이 기쁘지 않은 이들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2월이면 마음이 무겁다. 일본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진 취업 빙하기가 한국에서는 뒤늦게 시작되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은둔형 외톨이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청년을 위한 정책에 대한 논의가 보이지 않는다.
다양한 지원금 제도가 있지 않느냐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청년에게 가장 중요한 얘기, 어떻게 청년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논의는 정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청년 고용률과 실업률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리는 언론 기사도 찾기 힘들다. 2017년 대선 때만 해도 모든 유력 후보가 청년 고용을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내세웠다. 그러나 2022년 대선과 2024년 총선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청년 고용 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이 아니다. 20대 남성의 고용률이 60% 이하로 처음 떨어진 것은 2008년의 일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진 그해에 20대 남성과 여성의 고용률은 각각 59.4%와 59.3%였다. 2023년에는 각각 58.3%와 63.4%로 남성은 그때나 별 차이가 없고 여성은 소폭 상승했다. 그러나 취업자 수는 2008년의 395만 명에서 2023년 374만 명으로 줄었다. 청년 인구가 감소하는 나라에서 2008년의 일자리 수만 지켰어도 2023년의 고용률은 더 높았을 것이다. 청년을 위한 일자리가 줄었고, 많은 청년이 우울하게 졸업을 맞는다.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청년 일자리 창출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우리 사회가 아예 포기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청년 고용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년 연장이 논의되고 있다. 정년 연장은 아마 쉽게 결정이 날 것이다. 정년을 앞둔 사람들이 정책 결정자들이기 때문이다. 연금 개혁은 진척이 더딜 것이다. 개혁으로 손해를 볼 사람들이 정책 결정자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연금이 모두 고갈되어도 그 해 받은 돈으로 그 해 지급하면 되니까 문제가 없다는 사람들도 있다.
참 어리석은 생각이다. 미래의 청장년들이 과중한 연금 부담을 지면서 한국에 남아 있으려 할까? 노동 인력의 국가 간 이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우수한 인재라면 외국 어디라도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곳에서 일할 수 있다. 반면 지금 직업훈련을 받지 못한 청년들은 장년이 되어서도 경제력이 약할 것이다. 우수한 인재는 한국을 등지고 경제력이 약한 이들만 남는다면 한국을 떠날 수 없는 미래의 노인들은 누가 부양할 수 있는가?
한국의 청년들이 꽃을 피우지 못하고 시들어 가고 있다. 20, 30대 미혼율은 이미 일본을 넘어섰다. 그런데 그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팔뚝으로 날아드는 검을 막는 어른이 없다. 선거 때마다 청년들은 정치권에 이용당하고 버려진다. 권력자들은 청년을 이용해 자기에게 날아드는 검을 막는다. 이번 총선에서는 포기하더라도, 적어도 다음 대선 전에는 이렇게 말하는 정치 지도자를 보고 싶다. “시들지 말고 살아남아라. 더 좋은 대한민국을 같이 만들자.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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