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치료하는 의술은 인간의 출현 이후 우리와 언제나 함께했다. 의사라는 직업이 등장하기 전 인류는 오랫동안 전문적인 의료 대신에 다양한 민간요법으로 치료해 왔다. 한국도 1960년대까지도 집안에 환자가 생기면 병원에 가는 대신에 굿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인간 역사에서 유독 오랜 전통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외과 수술이다. 세균 감염과 출혈 등의 문제로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하지만, 우리의 예상과 달리 인류는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두개골 수술을 했음이 밝혀지고 있다. 1만 년 가까이 이어진 전문적인 의술의 역사를 따라가 보자.》
“뇌수술 후 3분의 1 장기생존”
두개골에 구멍 뚫린 흔적만을 들어서 외과 수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쟁이나 사고 또는 사후에 특별한 제의로 구멍을 뚫을 수 있다. 외과 수술의 흔적으로 판명되는 경우는 수술 후에 상당히 오랜 기간 생존하여 뼈가 자란 흔적이 있는 경우를 말한다. 두개골에 구멍을 뚫어 뇌수술을 한 흔적은 약 1만 년 전부터 보인다. 뇌수술은 구대륙은 물론이고 신대륙과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신대륙 남아메리카 잉카 문명에서 뇌수술이 활발하여 지금까지 1만 개 이상의 흔적이 발견될 정도이다. 1만6000년 전 베링해를 건너간 신대륙에서도 뇌수술이 발달했으니, 아마도 빙하기 시대에도 그 흔적이 나올 것이다.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 수술은 대략 5000년 전부터 이집트, 중국 등의 고대 문명으로 널리 확산된다. 이집트에서는 약 4600년 전에 활동했고, 영화 ‘미이라’의 주인공으로도 등장했던 임호테프가 있다. 그는 외과 수술을 비롯한 다양한 치료법으로 ‘의학의 신’으로 추종되었다. 약 3600년 전에 편찬된 치료서인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에도 자세한 두개골 치료법이 등장한다. 동아시아의 경우 한국에서 멀지 않은 중국 산둥반도 내 5000년 전 무덤 유적에서 수술한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이 인골의 뒷머리에는 직경 3cm 넘는 구멍이 뚫려 있어 꽤 대형 수술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수술 후에도 뼈가 오랫동안 자란 흔적이 있다. 즉, 수술이 성공적으로 되어서 환자가 오랫동안 생존했다는 뜻이다. 약 5000년 전부터 실크로드가 처음 열리고 동서 문명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발달한 뇌수술이 사방으로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어떤 연구는 선사시대에 뇌수술을 받은 사람 중 3분의 1 정도가 수술 후에 꽤 장기간 생존했다고도 한다. 고대인의 시술을 막연히 ‘돌팔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전쟁과 사냥 통해 발전한 수술
지금도 쉽지 않은 뇌수술이 신석기시대부터 발달했다는 것은 선뜻 믿기 어렵다. 가끔 미스터리 사이트에서 외계인이 전해준 기술이라는 음모론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런 기술은 사피엔스의 생존 과정에서 자연스레 습득된 것이었다. 지난 수십만 년간 인간은 다양한 동물을 사냥하고 해체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해부학적 지식이 습득되었다. 그리고 사냥 중 사고를 입으며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외과적 지식과 치료가 발달했다. 인간 사이의 전쟁도 뇌수술의 발달에 일조했다. 수술이 전 세계적으로 널리 확산된 5000년 전은 지구가 온난해지며 문명이 발달하며 서로 갈등도 심해졌다. 그 이후 상대를 효과적으로 살상하고 자기편 군인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수술도 발달했다. 승리의 필수 요소였다.
고대부터 사람들은 다양한 전쟁을 벌였다.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들은 곡괭이형 도끼로 서로 머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했고, 지금도 수많은 전사의 두개골에 그 흔적이 잘 남아있다. 그중에는 몇 번에 걸친 타격을 받고도 회복한 경우도 있다. 한편, 무기용 칼을 수리해서 만든 뇌수술용 메스도 다수 발견되었다. 서로 공격하고 부상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수술법도 발달한 것이다. 심지어 스키타이나 흉노와 같은 유목민들은 머리를 아예 밀거나 가발을 쓴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이렇게 머리털이 없으면 수술 시에 감염의 위험도 줄일 수 있었다. 지금도 수술 전에 면도는 필수인 것을 생각하면 고대인의 의학적 지식은 우리의 상상 이상이었다.
대마-약초 등 활용해 환자 마취
선사시대부터 외과 수술이 널리 유행했다면 수술 중 환자의 고통을 어떻게 다스렸을지도 궁금하다. 지금 일반적인 마취는 비교적 최근인 19세기에 일본과 서양의 여러 의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약간 이견이 있지만 1846년에 미국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이뤄진 클로로포름을 이용한 발치를 근대 마취의학의 시조로 보고 있다. 하지만 고대에 이러한 마취 기술은 발달하지 못했다. 의식을 잃게 하는 마취를 할 경우 환자가 제대로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대신에 환자의 의식을 몽롱하게 하거나 마약 성분을 이용하여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 널리 사용되었다.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역사서,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소설 ‘삼국지연의’와 다름)에는 화타가 사용한 ‘마비산’에 대한 기록이 있다. 대마와 만다라화, 초오, 백지 등 여러 마취 성분을 섞은 것이다. 화타의 처방은 매우 구체적이어서 먼저 침이나 약으로 치료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마비산을 마시게 해 수술했다고 한다.
고고학 자료 역시 고대의 마취제를 증명한다. 2400년 전 알타이 고원에서 발견된 여성 샤먼(일명 얼음공주)의 미라 근처에서는 고수, 대마, 물싸리 등의 약초가 함께 발견되었다. 유방암과 낙상 사고로 죽기 전까지 마취 성분이 있는 약초를 마시며 고통을 다스린 흔적이다. 실크로드 타클라마칸 사막의 4000년 전 만들어진 샤오허 무덤에서는 에페드린 성분의 마황이 발견되기도 했다. 한국사에도 마취제의 증거가 있으니 연해주의 옥저 유적 불로치카에서도 다량의 양귀비 씨앗이 발견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무덤에서 고통을 줄이는 약초들이 자주 발견되는 것을 보면 약을 끼고 사는 현대인의 모습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관우가 받은 수술의 진실은
일반인들에게는 삼국지의 주인공 관우가 받은 수술이 유명하다. 관우가 전쟁 중에 독화살을 왼쪽 어깨에 맞아 뼈가 곪고 통증이 심해지자 뼈를 깎는 수술을 받았다. 그 와중에도 관우는 태연하게 장수들과 술을 마셨다고 한다. 다만 일반인들은 소설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화타가 고쳤다고 오해를 많이 한다. 사실 관우의 수술 훨씬 전에 화타는 죽었고, 관우를 고친 사람은 무명의 군의관이었다. 아마 관우가 마셨던 술에 통증을 줄이는 여러 약초가 섞여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쟁이 일상화되었던 당시에 병영 내에서 화살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일상다반사였고, 관우의 행동은 다른 부상병들에게도 귀감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용맹스러운 군사가 있다고 해도 부상자의 관리와 치료가 없이는 제대로 유지되기 어려웠다. 그러니 칭기즈칸이나 티무르와 같이 세계를 정복한 부대의 뒤에는 효과적인 부상병 관리와 치료가 뒤따랐을 것이다. 지금의 눈으로 봐도 쉽지 않은 정교한 외과 수술을 무명의 군의관이 했다는 것은 삼국 간 치열한 전쟁의 보이지 않는 주역은 바로 의술이었음을 의미한다.
인간 사이의 전쟁과 사냥으로 시작된 수술은 기원전 2∼3세기에 본격적인 의사들이 중국과 로마에서 등장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 과정에서 지난 1만 년간 발달한 외과 의술은 완전히 망각되었다. 동양의학은 수술 대신에 침과 뜸이 발달했고, 지금의 외과 수술은 근대 서양의학의 발달에서 기인했다. 최근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 의료제도를 둘러싼 여러 논쟁이 있다. 1만 년을 이어 온 수술의 역사에서 보듯이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의술과 함께했다. 의술을 제대로 활용한 집단만이 생존할 수 있었다. 21세기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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