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별세를 계기로 그의 대표작 ‘헨리 키신저의 외교’(원제 ‘Diplomacy’·김앤김북스)가 발간 5개월여 만인 지난달 3쇄를 찍으며 국내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약 900쪽에 이르는 이 책은 까다로운 문체와 방대한 분량으로 1994년 원서 발간 이후 30년 가까이 국내에 소개되지 못하다 현직 외교관인 김성훈 주유엔대표부 참사관에 의해 지난해 8월 번역 출간됐다. 미국 현실주의 외교의 대가로 현실 외교와 학계를 두루 섭렵한 키신저답게 세계 외교 통사(通史)를 그만의 통찰력으로 집대성한 대작이다. 지난해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에 이어 이달 24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2주년을 맞는 등 지정학의 시대가 다시 도래하며 현실주의 외교 고전인 이 책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21년간 외교 현장을 지키며 이 책을 번역한 김 참사관은 “한반도 분단은 세계적 흐름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며 “20세기 이후 세계 질서는 미국이 만들어 놓은 것이기에 이를 깊이 있게 분석한 키신저의 책은 21세기를 사는 한국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2년 전 유엔총회에서 북한의 전술핵 사용 위협을 규탄하며 북한 외교관과 공개 설전을 벌여 주목을 받은 그는 바쁜 업무로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다 일과를 마친 오후 9시(미국 현지 시간 기준)가 넘어서야 뉴욕 자택에서 동아일보와 통화했다. 그는 “30년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처럼 ‘힘의 공백기’에는 항상 전쟁이 터진다는 걸 키신저는 이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며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호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 미국의 조약동맹국(treaty ally)들은 동맹조약 체결 이후 침략을 당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리처드 하스 전 미국외교협회장의 ‘혼돈의 세계’를 포함해 이번이 여섯 번째 번역서라고 들었다.
“외교관은 협상이나 의전에만 치중한다는 외부 시각이 있는데 실상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이다. 책을 번역하다 보면 자연스레 공부가 되는 데다 문서 번역이 평소 업무이기도 하다.”
─키신저의 웬만한 저작들이 국내에 거의 번역됐는데 유독 ‘Diplomacy’만 30년 가까이 번역이 안 된 이유가 뭔가.
“이 책은 수백 년에 걸쳐 유럽, 중동, 아시아 등 다양한 지역의 외교사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외교 이념을 이해하려면 국제정치 사상도 봐야 한다.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 등 국제정치 이론도 다룬다. 다양한 지식이 씨줄, 날줄로 이어지는 높은 난도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번역에 3년이 걸렸는데 어떤 부분이 특히 까다로웠나.
“키신저가 독일 태생이라 그런지 문장을 길게 쓰면서 주어와 동사를 도치시키고, 긴 명사구를 즐겨 쓰는 독일어식 표현이 많아 읽기가 까다롭다. 초벌 번역에는 10개월이 걸렸지만 국제정치학 용어 등을 꼼꼼히 검토하고 역주를 다는 데 2년이 더 걸렸다. 특히 나온 지 30년이 된 고전이기에 독자들이 시의적절하게 읽을 수 있도록 역주를 최대한 많이 달았다. 책 분량상 많이 잘렸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등 최근 사건도 디테일하게 역주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키신저는 서문에 미국 외교관을 위한 책임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외교계와 학계에서 필독서처럼 읽히는 이유가 뭔가.
“한국 입장에서만 국제정치를 보면 일종의 ‘한반도 천동설’로 흐를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 분단 과정만 봐도 냉전이라는 세계적 흐름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이 책 19장이 6·25전쟁을 다루고 있는데 전쟁이 일어난 배경이 18장부터 20장까지 쭉 이어진다. 즉,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이 영국 런던에 있던 폴란드 임시정부를 무시한 채 (공산주의자 중심의) 루블린 임시정부를 세우고, 체코에서 공산주의 쿠데타를 지원하는 등 공산주의가 팽창하는 과정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20세기 이후 세계 질서는 미국이 만든 것으로, 미국이 정원사(gardener)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이 만든 큰 틀의 구조에서 세계가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시각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최근 지정학의 시대가 다시 도래하면서 현실주의 외교를 대변하는 이 책도 주목받는 것 같다.
“키신저는 철저히 현실주의로 접근하면서도 윌슨주의가 상징하는 미국의 이상이나 가치도 같이 가야 한다고 봤다. 사실 국제정치에서 지정학은 항상 있어 왔는데, 탈냉전 시기에는 러시아가 붕괴하고 중국이 크지 않아 지정학이 숨겨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국 주도로 진행된 세계화가 역풍을 맞으면서 지정학적 대립이 부각된 측면이 있다.”
─현직 외교관으로서 이 책이 남다르게 다가온 점이 있다면….
“외교관이 되기 전에도 봤는데 지금 읽으니 더욱 현실감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키신저가 상상하는 세계를 추종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 통찰력이 있었던 분이라고 생각한다. 베르사유 체제를 설명하는 12, 13장은 힘의 공백기에 항상 전쟁이 터진다는 걸 보여준다. 예컨대 1차대전이 끝난 뒤에는 독일 주변 동유럽 지역에 취약한 신생 독립국들이 생겨 (2차대전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씨앗을 남겼다. 싫건 좋건 국제정치에서 ‘세력권(sphere of influence)’이 있고, 힘의 공백을 누가 채우느냐가 관건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과 일본, 호주, NATO와 같은 미국의 조약동맹국들을 한번 보자. 이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를 잘 따르는 선진국으로, 상호 간 비자를 요구하지 않고 자유무역을 하면서 (미국) 핵우산의 보장을 받는다. 그런데 이들은 미국과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나서 ‘전면전’의 침략을 받은 적이 없다. 반면 힘의 공백 상태에 놓였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략을 받았다. 남중국해의 경우에도 필리핀이 미국의 동맹이지만 (미국이) 핵우산을 제공해 줄지는 의문이다. 이런 지역은 갈등이 생길 여지가 있다. 이처럼 키신저가 말하는 세력권은 현재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
─저자는 트루먼을 만난 일화를 특유의 냉소적 유머로 서술했다. 번역자로서 특히 재밌게 본 대목은….
“의미심장한 게 외교사에서 격변을 겪을 때마다 세상이 크게 변화됐다는 거다. 예컨대 1차대전을 겪고 나니 다민족 제국이 사라졌다. 2차대전 후에는 식민주의 제국들이 사라졌다. 이어 냉전이 끝나니까 공산주의 제국이 사라졌다. 탈냉전 이후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는 국가 체계가 흔들릴 수 있다. 냉전의 형성과 더불어 건국이 이뤄진 대한민국은 상대적으로 신생국인데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양차 대전의 격변을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남았는지 그 스테이트크래프트(statecraft·국정운영술)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키신저는 6·25전쟁에서 청천강과 함흥만을 잇는 선에서 미군의 진격이 멈췄다면 중국의 개입을 막으면서도 남북한 인구의 90%를 흡수하는 성과를 거뒀을 거라고 주장했다. 국토 완정을 바라는 한국인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논리인데….
“키신저의 강대국 중심의 사고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마치 19세기 유럽의 빈 체제에서 열강들이 주변국을 흥정의 대상으로 삼아 질서를 유지하려고 한 시각과 유사하다. 사실 민족 문제는 차가운 머리로만 접근하기 힘들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위상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미국이 조약동맹국인 한국을 포기하면 국제사회에서 신뢰도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한국은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요도가 매우 크다.”
─키신저의 세력 균형 관점에서 러시아의 부상은 미중 갈등을 완화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중국과 러시아가 갈등을 벌여야 하는데 아직은 공동의 적(미국)이 있지 않나. 그런데 러-중이 미묘한 관계인 것은 맞다. 19세기부터 러시아가 중국과 네르친스크, 아이훈 조약 등을 맺으면서 극동 지역에서 영토를 넓혔다. 과거 중국 영토였던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의 면적이 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비슷하다. 극동 지역에 사는 러시아 인구는 800만 명이지만, 중국은 동북 3성의 인구만 9000만 명에 이른다. 러시아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부담을 느낄 것이다.”
─키신저는 냉전 시기 조지 케넌의 대(對)소련 봉쇄 정책이 너무 긴 시간을 끌었고, 타협의 여지를 없앴다고 비판했다. 이는 중국을 경제·기술적으로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최근 정책과 관련해 어떤 함의를 갖는가.
“현재는 냉전 당시 미소 관계와 달리 미중이 경제적으로 긴밀히 연결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때처럼 봉쇄 정책을 중국에 적용할 수 있을까. 바이든 행정부도 신냉전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중국과 협력할 것은 하겠다는 것이다. 강대국들이 각만 세우면 양차 대전처럼 파국에 이를 수 있다. 생전에 키신저는 미중 갈등이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사전에 막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김성훈 주유엔대표부 참사관
△2002년 서울대 외교학과 학사 △2007년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공공정책학 석사(풀브라이트 장학생) △2003년 제37회 외무고시 합격 △외교부 주미 대사관, 주수단 대사관, 국가안보실, 중동 2과장 등 근무 △‘미국 길들이기’ ‘혼돈의 세계’ ‘피크 재팬’ ‘미국 외교의 대전략’ 등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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