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모두 네 종의 김민기 전집이 발표됐다. 별다른 제목도 없이 그저 ‘김민기 1’ ‘김민기 2’ 이렇게 제목이 붙어 있었다. 넉 장의 음반에는 그간 김민기가 발표해 온 노래가 망라돼 있었다. ‘아침이슬’ ‘친구’처럼 유명한 노래를 다시 불렀고, 그전까지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들처럼’과 ‘금관의 예수’란 제목으로 불려 온 노래들의 제목을 각각 ‘상록수’와 ‘주여 이제는 어디에’로 바로잡아 주었다. 또한 정부의 탄압과 검열로 김민기란 이름 대신 다른 이름으로 발표했던 노래들의 주인이 김민기란 사실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그 노래들은 아름답고 깊었다. 울림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2등 혹은 패배자들에게 전하는 ‘봉우리’는 어떤 말보다 커다란 위로를 전해주었고, 아이들과 함께 부르는 ‘날개만 있다면’은 어떤 노래보다 숭고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공식적으로 음악을 발표하는 김민기를 위해 수많은 후배가 앨범에 참여했다. 이병우가 기타를 연주하고, 김광민이 피아노를 쳤다. 한영애와 장필순, 한동준은 목소리를 보탰다.
김민기는 1995년 동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번 전집은 제 노래의 온전한 모습과 작곡자의 ‘실명’을 찾으려는 작업입니다. 그동안 삭제나 개사 등 수난이 많았고, 또 제 이름으로 노래를 발표할 수 없어 주인이 바뀐 곡도 많았어요”라고 출시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학전이 아니었다면 김민기 전집은 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노래 부르는 걸 꺼리고 자신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김민기의 성향상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후 이 전집이 실제 학전의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작됐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학전. 배울 학(學)에 밭 전(田) 자를 쓰는 이 조그만 극장은 그 크기와 관계없이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김윤석, 설경구, 조승우, 황정민 등의 배우를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지만, 수많은 음악인도 학전 무대에 올랐다. 김민기는 학전을 “못자리 농사를 짓는 곳”이라 표현했다. 모내기할 모를 키우는 곳이란 뜻이다. 그만큼 수많은 원석이 학전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학전에서 김광석이 1000회 공연을 할 때 다듬어지지 않았던 나윤선이나 윤도현은 같은 무대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시간은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학전은 결국 폐관을 결정했다. 폐관을 앞두고 마지막 공연이 진행 중이다. 더 이상 학전 운영 자금 마련을 위해 앨범 제작을 제안하는 음반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30년 전과 비교해 김민기란 이름이 더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남겨진 김민기 전집이 더 귀하다. 무엇보다 그토록 깊은 노래를 부르는 김민기의 목소리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경과 영애가 처음 불렀던 노래 ‘아름다운 사람’도 김민기의 음성에 따라 다른 느낌을 준다. 그 쓸쓸한 목소리로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라 노래할 때 우리는 ‘사람’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 오랜 시간, 김민기는 한결같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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