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공정 경쟁 촉진법(플랫폼 경촉법)은 아시아에서 기술 기업에 대한 규제 강화 요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이 거대 기술 기업의 영향력을 우려하는 것처럼 한국 역시 비슷한 우려를 하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16일 한국의 플랫폼 경촉법 제정이 무기한 연기됐다고 보도하면서 이 같은 분석을 덧붙였다. 플랫폼 경촉법은 소수의 거대 플랫폼 기업을 ‘지배적 사업자’로 지정하고 이들이 경쟁자를 밀어내기 위한 불공정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규율하는 법이다. 하지만 플랫폼 업계가 거세게 반발하고 이에 국회 설득마저 어려워지자 공정거래위원회는 이 법의 핵심인 ‘사전 지정 제도’를 포함해 법안을 전면 재검토하기로 했다.
거대 플랫폼 기업을 규제하려는 움직임은 미국이나 한국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일은 아니다. 유럽은 이미 비슷한 법을 만들어 다음 달 시행을 앞두고 있고, 일본, 호주 등에서도 공룡 플랫폼 규제와 관련한 입법 바람이 불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플랫폼 패권을 둘러싼 경쟁이 심화되고 이에 따른 ‘반칙’ 행위도 빈번해지자 각국이 대응 마련에 나선 것이다.》
● 영향력 키우는 中 플랫폼
통신, 쇼핑, 교통 등 일상 속 디지털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지배적인 플랫폼 사업자가 되기 위한 정보기술(IT) 업계의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다. 지난해 미국에서는 ‘초저가·가성비’를 내세운 중국 이커머스 테무가 아마존을 제치고 미국에서 가장 많이 다운로드된 모바일 쇼핑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올라섰다. “억만장자처럼 쇼핑하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미국 시장에 진출한 지 5개월 만에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플랫폼 시장의 지각변동은 현재진행형이다. 중국 이커머스 알리익스프레스, 테무는 한국에서도 공격적인 영업을 시작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앱 분석 업체 아이지에이웍스의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지난달 알리익스프레스 앱 이용자(MAU·한 달에 한 번은 서비스를 쓴 이용자)는 전체 모바일 앱 중 68번째로 많았다. 지마켓(72위), 무신사(77위) 이용자보다 많은 규모다. 테무 이용자 순위는 한 달 전보다 22단계 올라선 80위로 100대 모바일 앱에 진입했다.
국내 거대 플랫폼 기업과 글로벌 강자인 미국 플랫폼 기업 사이의 경쟁도 치열하다. ‘국민 앱’이라 불리던 카카오톡은 지난해 12월부터 이용자 수 1위 자리를 유튜브에 내줬다. 지난해 12월 유튜브 이용자는 4564만5347명, 카카오톡은 4554만367명이었다. 국내 검색 시장을 절반 넘게 장악하고 있는 네이버 역시 구글과의 경쟁에서 자유롭지 않다. 10년 전만 해도 국내 검색 시장 점유율이 10% 수준이었던 구글은 지난해 31.9%까지 점유율을 끌어올리며 1위인 네이버(58.2%)를 추격하고 있다.
● ‘승자 독식’, 늘어나는 플랫폼 반칙
문제는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플랫폼 경제의 특성상 과열 경쟁이 반칙 행위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플랫폼이 한번 시장을 선점하면 입점하는 업체들이 많아지고, 입점 업체가 많아지면 플랫폼 이용자가 늘어나는 연쇄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이른바 네트워크 효과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한번 지배적인 사업자가 된 플랫폼 기업은 이용자를 계속 늘릴 수 있고, 인접한 시장에도 손쉽게 진출할 수 있게 된다. 이 때문에 시장 점유율을 높이려는 불법 행위가 끊이지 않게 된다”고 설명했다.
동영상 스트리밍 시장을 독점한 유튜브가 국내 음원 시장에 손쉽게 진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구글은 국내 유튜브 프리미엄 구독자에게 유튜브 뮤직을 끼워 팔았는데, 그 결과 지난해 말 토종 앱 멜론을 제치고 한국 음원 플랫폼 시장에서 1위를 차지했다. 현재 공정위는 구글의 이런 행위가 시장 지배력 남용에 해당하는지 살펴보고 있다. 구글은 2016년에도 자사 앱마켓 ‘구글플레이’에 입점한 게임사들에 경쟁사 앱마켓 ‘원스토어’에 게임을 출시하지 않는 조건으로 각종 혜택을 주다 적발되기도 했다.
카카오, 네이버와 같은 국내 플랫폼 기업의 불공정 행위 역시 이어지고 있다. 카카오모빌리티는 자사 가맹 택시에는 콜(승객 호출)을 몰아주고 경쟁사로 가는 콜은 차단하다 적발됐다. 카카오스타일도 입점 업체들에 ‘우리 플랫폼에서만 할인 행사를 하라’고 강요한 혐의로 공정위의 조사를 받고 있다. 네이버도 과거 검색 알고리즘을 조작해 자사 오픈마켓인 ‘스마트 스토어’ 입점 업체를 상단에 노출했다가 공정위로부터 200억 원대 과징금을 부과받은 바 있다.
결국 세계 각국에서 거대 플랫폼 기업을 지배적 사업자로 사전에 지정해 강도 높게 규율하는 법을 추진하고 있는 배경에는 이 같은 플랫폼 기업들의 반칙 행위가 자리 잡고 있다. 플랫폼 규제법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유럽연합(EU)은 플랫폼 경촉법과 유사한 디지털시장법(DMA)을 다음 달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한다. 이에 따라 이 법이 정한 ‘게이트키퍼’인 구글, 아마존, 애플, 메타 등은 자사 우대, 끼워팔기를 비롯한 불공정 행위를 해선 안 된다.
일본에서도 공룡 플랫폼 규제법 제정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일본 경쟁당국은 지난해 2월 ‘모바일 운영체제(OS) 및 앱 유통에 관한 시장 조사 보고서’를 내고 “모바일 OS 시장과 앱 유통 서비스 시장에서 경쟁이 불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애플과 구글이 앱 시장 등에서 독점금지법 위반 행위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지난해 6월에는 일본의 디지털시장경쟁본부가 보고서를 내고 일정 규모 이상의 모바일 플랫폼 사업자를 규제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규제법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한국 정부의 한 관계자는 “올 상반기(1∼6월) 중 유럽의 DMA와 비슷한 법이 일본에서도 발의될 것으로 보인다”며 “우리 정부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호주의 경쟁당국 역시 글로벌 빅테크의 영향력에 대응할 새 경쟁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호주에서도 올해 안에 비슷한 입법이 추진될 것이란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 첩첩산중인 플랫폼 경촉법 제정
미국 빅테크와 겨루는 자국 플랫폼이 거의 없다시피 한 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국내 기업들이 시장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어 플랫폼 경촉법을 둘러싼 셈법은 더 복잡하다. NYT는 “플랫폼 경촉법의 연기는 법안 반대 로비를 펼쳐 일시적으로 승리한 결과”라며 “과거에는 미국의 거대 기술 기업들이 보호주의 정책이 불공정 경쟁을 만든다며 과잉 규제를 비난했지만 이번에는 한국 기업들이 반발하고 나섰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거대 플랫폼 기업의 시장 지배력 남용에 대한 현재의 제재로는 불공정 행위를 막기에 역부족이라고 지적한다. 플랫폼 경촉법을 전면 재검토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플랫폼 반칙 행위에 대한 감시는 강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상승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현재로선 시장 지배력을 남용한 플랫폼 기업에 대한 제재가 너무 늦게 이뤄지고 있다. 공정위가 더 엄정하게 법을 집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 교수는 “공정위의 조사 권한에 한계가 있어 해외 플랫폼은 감시망을 벗어날 우려가 있다. 공정위가 국내 기업 역차별 우려를 불식시킬 명확한 해답을 내놔야 할 것”이라고 했다.
국내 IT 업계는 구글과 같은 외국 플랫폼 기업들이 한국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매출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는 만큼 지배적 사업자 지정을 피하는 등 규제망을 벗어날 것이라고 우려해 왔다. 자료 제출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징벌적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미국 경쟁당국과 달리 공정위에는 그러한 권한이 없다.
IT 업계의 반발에 법안을 재검토하고 있는 공정위는 조만간 전문가들과의 회의를 통해 추가적인 의견 수렴에 나설 예정이다. 공정위는 사전 지정 제도를 포함해 법안을 원점 재검토하되, 사전 지정 제도와 비슷한 제재 단축 효과를 낼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시각이 많다. 지난해 공정위가 만든 온라인 플랫폼 규율 개선 전문가 태스크포스(TF)에 참여했던 이황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전 지정 제도가 빠지면 이 법의 의미가 크게 반감된다. 다른 대안도 별로 마땅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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