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의 권주가[이준식의 한시 한 수]〈253〉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2월 29일 23시 18분


대지는 백설로 뒤덮이고 바람은 찬데, 주먹만 한 눈송이가 공중에 흩날린다.
도연명이 웃다 자빠지겠소. 잔 그득한 술을 마시지 않겠다시니.
그대 거문고 어루만져 봐야 부질없고, 버드나무 다섯 그루 심은 것도 헛된 노릇.
머리 위 망건도 괜히 쓴 것이려니, 내 존재가 그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는지?
(地白風色寒, 雪花大如手. 笑殺陶淵明, 不飮杯中酒. 浪撫一張琴, 虛栽五株柳. 空負頭上巾, 吾於爾何有.)

―‘술 안 마시려는 왕역양을 놀리다(조왕역양불긍음주·嘲王歷陽不肯飮酒)’ 이백(李白·701∼762)
주선(酒仙) 이백의 수많은 권주가 중 또 하나의 색다른 권주 방식. 비웃기라도 하듯 상대의 취향을 조목조목 열거한다. 시제가 흥미롭다. 자신을 위해 특별히 주연까지 마련했는데 왜 그를 놀리는 걸까. 놀림이라기보다는 주흥을 돋우려는 우스갯소리로 이해하면 되겠다. 게다가 성 뒤에 이름자 대신 상대가 거주하는 역양(歷陽)이란 지명을 붙인 건 상대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기도 하다.

백색 천지에 쏟아지는 함박눈, 음주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이참에 도연명을 존숭한다는 그대가 술을 마다한다? 도 선생이 술 마실 때 곁에 두고 어루만졌다는 줄 없는 거문고, 오류(五柳) 선생이란 호를 지을 정도로 버들을 좋아한 취향까지 답습하려고 이것저것 살뜰히도 챙기시는구려. 한데 도 선생에게 망건이 왜 소중했는지 아시오? 술 걸러 서둘러 마시기엔 망건이 제격이었기 때문이오. ‘또다시 통쾌하게 술 마시지 못할 바엔, 머리 위 망건은 괜히 쓴 것이지’(도연명의 ‘음주’ 제20수)라는 말이 바로 그 뜻이오. 술을 거부하는 건 그대가 건성건성 흉내만 내는 것이니 여간 실망스럽지 않소. 시인의 이런 놀림에 술 못하는 상대가 돌연 술을 들이켰을 리는 없겠지만 도연명을 흠모하는 마음만은 서로 일치한다는 사실은 확인했을 듯하다.
#이백#권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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