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으로 가는 특급열차의 승차권이 한꺼번에 풀렸다. 올 1월 정부가 준공 후 30년이 지나면 안전진단 없이도 재건축에 나설 수 있게 하면서부터다. 노후도시 정비 대상 지역도 당초 1기 신도시 등 51곳에서 전국 108곳, 215만 채로 늘렸다. 특별법 인센티브를 받으면 용적률을 최대 750%까지 올릴 수 있다. 기존 20층대 아파트 위에 아파트 두 채를 더 얹는 셈이니 그동안 재건축이 사실상 힘들던 아파트도 ‘우리도 혹시’ 하며 희망을 갖게 됐다.
정부의 지원과 총선 후보들의 공약이 온통 재건축으로만 쏠리면서 정비 사업의 또 다른 한 축인 리모델링은 찬밥 신세가 됐다. 리모델링은 기존 아파트를 완전히 철거하는 재건축과 달리 뼈대를 유지한 채 고쳐 짓는 방식이다. 재건축·재개발 규제가 강했던 지난 정부에선 상대적으로 사업비가 적게 들고 진행 속도도 빨라 대안으로 주목받았지만 재건축을 미는 현 정부 들어서는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리모델링을 추진하다 좌초된 곳도 많고, 기존 리모델링 조합과 새로 들어선 재건축추진위원회로 갈려 갈등을 빚는 단지도 많아졌다.
리모델링에 결정적 타격을 준 것은 지난해 7월 국토교통부와 법제처의 유권해석이었다. 기존에는 1층을 필로티 구조로 바꾸고 최상층을 한 개층 올릴 경우 수평증축으로 판단했는데, 수직증축에 해당한다고 해석을 바꾼 것이다. 1차 안전진단으로 끝나는 수평증축과 달리 수직증축은 2차 안전진단을 거쳐야 해 비용과 시간이 더 든다. 1층을 필로티로 하고 구조 보강을 하면 오히려 안전하다는 게 구조기술 업계의 판단이지만 정부는 과학적, 기술적 검증보다 법령의 문언적 해석에 주력했다.
아파트 리모델링은 2001년 건축법 시행령에서 처음 개념이 반영됐고, 2003년 주택법 개정으로 제도화됐다. 멀쩡한 콘크리트 건물도 부수는 무분별한 재건축 추진을 막기 위한 대안으로 도입됐다. 하지만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리모델링 제도와 규제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그동안 건설 기술이 크게 발전했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았다며 리모델링 활성화에 미온적이었다. 사실 인기 있는 정책이긴 힘들다. 기존 뼈대를 살려야 해 구조상 제약이 많은 리모델링보단 화끈하게 부수고 새로 짓는 재건축이 더 선호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부의 달콤한 약속을 믿고 재건축행 열차에 탑승하면 곧바로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좋은 자리를 앉으려면 비싼 웃돈을 내야 한다. 그동안 안전진단 등의 문턱에 걸려 후순위로 밀렸던 단지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철저하게 사업성에 따라 우선순위가 갈린다. 더 시급한, 더 오래 기다려온 단지가 뒤로 밀릴 수 있다.
사실 지금 재건축 사업이 부진한 건 안전진단이 아니라 건설경기 부진과 공사비 상승 등에 따른 사업성 악화 때문이다. 재건축을 쉽게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라며 앞으로 더 많은 규제 완화를 요구할 텐데 정부가 어떻게 뒷감당을 할지 의문이다. 선거가 끝나면 한발 뺄 수도 있다. 정부의 정확한 워딩은 준공 30년 지나면 안전진단 없이 재건축에 ‘착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아파트를 재건축하는 건 사실상 힘들다. 지난해 서울시는 시내 공동주택 4217개 단지 중 3087개는 재건축은 어렵고 리모델링만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 정부 정책 방향에 따라 재건축과 리모델링 사이에서 핑퐁 게임을 할 것이 아니라 단지의 상황과 여건에 따라 정비 방식을 합리적으로 고를 수 있도록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 그래야 도심 주택 공급도 다양한 방식으로 차질없이 진행될 수 있다. 지금처럼 정부가 총선을 앞두고 재건축 승차권을 흔들며 호객 행위를 한다면 헛된 기대감만 심어줘 정비사업 전반을 왜곡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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