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에 시작됐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바람이 연구 현장에 매섭게 몰아치고 있다. 올해 초 10∼90% 줄어든 연구비로 협약에 나서야 하는 현실에 맞닥뜨린 연구소 및 대학의 연구자들의 가슴은 먹먹하기만 하다. 정부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만 하면 연구비는 복원된다”고 하지만 과학기술계 전반의 사기 저하가 심상치 않다.
예산 운영에서 낭비와 비효율성을 줄이겠다는 정부의 생각 자체를 틀리다 비난할 생각은 없다. 이후가 문제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과에 매몰돼 기반 연구를 도외시해선 안 되며 단순한 계량적 잣대로 R&D 성과를 재단해서도 안 된다. 오랜 현장 연구와 연구비 기획 및 집행기관에서의 행정 업무, 나아가 여러 부처의 다양한 사업 평가에 참여했던 경험을 토대로 연구자와 현장을 중시하는 R&D 혁신 방안을 제시해 본다.
첫째, R&D 오픈 플랫폼을 도입하자. 대한민국만큼 유행에 민감한 나라는 없다. 과학계도 예외가 아니어서 떠오르는 연구 분야의 경우 중복 혹은 당장 필요하지 않은 지출이 이뤄지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정부 주도가 아닌, 과학계와 과학자들이 중심이 되는 오픈 플랫폼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유럽연합(EU)은 주요 연구 주제 및 연구 프로그램, 지원 정책에 대한 정보를 EU 위원회 홈페이지에 분야별로 투명하게 공개한다.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 프로젝트 제안서와 선정 과정, 연구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불필요한 중복 예산 지원, 특정 분야 편중, 성과 미비 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둘째, 과학기술의 뼈대인 기초연구에 R&D 예산 30%를 투자하자. ‘원천연구’로서 기초연구는 국가와 인류 전체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과학기술 발전의 굳건한 토대다. 정부가 제시해 온 세세한 R&D 가이드라인이 오히려 기초연구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직시할 때다. 정량적 목표가 엄격히 정해진 틀 안에서 세계적으로 우수한 창의적 기초연구가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원천성 기초연구에 생애주기별 블록펀드 방식을 도입해 연구 업적만 우수하다면 평생 연구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그간 우수 연구자들에게는 창의연구자, 국가과학자연구사업 등 기회가 제공되기도 했으나 한시적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초기 지원 규모를 줄이더라도 연구자 주도 환경에서 지속적 연구가 가능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셋째, 대한민국 기술력의 산실이 될 출연연의 역할 혁신이 필요하다. 최근 과학기술 분야 25개 출연연이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규제에서 제외됐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다. 2008년 이래 출연연이 연구기관이라는 특수성을 인정받지 못해 경쟁력 제고에 걸림돌이 된다는 과학계의 오랜 요청을 반영한 결과다. 출연연은 그 기대에 보답해 자율성을 갖되 책임윤리를 확보하고 연구 수월성을 크게 높여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연구소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물론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추가로 뒷받침돼야 한다.
정부가 내놓은 예산 감축의 강경책이 과학계를 이미 뒤흔들었다. 여기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면 과학계가 감내한 고통, 정부의 장밋빛 청사진 모두 헛수고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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