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를 나온 고(高)스펙 졸업자는 대기업 공채로 직장을 시작하지만, 반대편에는 박봉의 비정규직으로 출발하는 이들이 있다. 상부와 하부 노동자 사이의 갭이 큰,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다. 전문직의 경우 지식과 기술, 감수하는 위험의 크기가 연봉에 비례해 올라간다. 그런데 위아래가 뒤집힌 신기한 분야가 있다.
의대를 나와 의사고시에 갓 합격하면 일반의 자격증을 딴다. 보통 6년인 전공의 수련 과정을 안 밟아도 미용 시술을 익혀 개원하면 월 소득 1000만 원을 거뜬히 버는 이른바 ‘무천도사’, ‘월천도사’가 된다. 응급도 없고, 소송 위험도 크지 않다. 그 정점이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개원의’다. 심지어 안과에서 비급여 무릎연골주사로 돈을 번다.
반면 대학병원에 남으면 1만 원 남짓한 시급을 받고 주당 80∼100시간씩 일하는 전공의가 된다. 시스템의 밑바닥에서 갈려 나가다가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 병원에 남으면 과로와 소송, 고소득 개원의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전임의(펠로)가 된다.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등 붕괴된 필수의료를 살리려면 넘치는 개원가를 눌러줄 정책도 필요하다. 수술실을 지키는 필수의료 의사들이 개원을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아주대병원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던 중증외상 권위자 이국종 교수(현 국군대전병원장)는 마음만 먹으면 병원을 열어 떼돈을 벌 수 있다. 그럼에도 수많은 ‘이국종들’이 소명 의식으로 버티고 있다.
의료 개혁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모든 국민이 지금처럼 적은 부담으로 필수의료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심장 수술비가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는 나라는 우리가 지향하는 국가가 아니다. 힘들게 고난도 필수의료 치료를 하는 의사는 많은 보상을, 그렇지 않은 의사는 적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서울대 의대 수석 졸업생의 종착지가 동네 피부과 개원인 현실을 바꿀 수 있다.
국민이 지출할 수 있는 의료비에는 한계가 있다. 건강보험 덕분에 필수의료를 적은 부담으로 누릴 수 있다 보니, 여윳돈으로 미용 등 비필수 비급여 의료에 돈을 낼 여력이 생긴다. 진료비를 시장 논리에 맡기면 필수의료 의사들은 떼돈을 벌고 미용 개원가는 쪼그라들 것이다. 사람이 살고 봐야 피부도 가꾸고 턱도 깎기 때문이다. 개원가는 건보 시스템의 반사이익으로 고소득을 누린 측면이 있다.
결국 결론은 비필수 개원가의 수익을 필수 분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정책과 법, 조세 제도에 기반한 ‘부의 재분배’가 필요하다. 의사들 입에서 “피부과 개원은 편한데 돈은 안 돼”, “중증외상은 힘들어도 많이 벌어”라는 말이 나와야 문제가 풀린다. 이를 제일 잘 알았던 의사들이 먼저 문제를 바로잡으려 노력했다면 지금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유홍림 서울대 총장은 지난달 입학식 축사에서 “이웃과 사회의 안녕을 도외시하며 이뤄진 개인의 성취는 사회에 부담을 줄 뿐 아니라 그 자체로도 행복하기 어렵다. 내 삶의 계획이 시대적 요청과 조화를 이루는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고 했다. 의사들을 향한 죽비(竹篦) 소리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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