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응급실. 50대 민간인 남성 A 씨가 정오쯤 구급차에 실려 왔다. A 씨의 두 발목은 다리와 연결된 피부 끝부분 정도만 남고 거의 절단된 상태였다. 공사장에서 낙상 사고를 당했는데, 함께 떨어진 철제 H빔이 발목을 관통해 버린 것. 1분 1초가 시급한 중증 응급·외상 환자였지만 서울 대형병원 두 곳은 의사 부족 등을 이유로 수술을 거절했다. 그는 사고가 발생한 서울 은평구의 한 공사장에서 50km나 떨어진 군 병원까지 와야 했다. 사고 4시간이 지나서야 응급실에 도착한 것.》
군 의료진은 A 씨 도착 직후 병원 내 국군외상센터에서 수술을 시작했다. 정형외과 문기호 중령(국군외상센터 제2진료과장·41)·안주석 중령, 외과 김윤섭 중령, 성형외과 권진근 소령 등 군의관 전문의들과 마취과 전문의들이 투입됐다. 절단 외에 방법이 없어 보일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지만 군 의료진은 10여 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발목을 재건했다. 현재 그는 중환자실을 거쳐 일반 병실에서 회복 중이다. 군 관계자는 “지금은 발가락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됐다”고 전했다.
● 12개 군 병원, 민간인 응급환자 진료
전공의 파업에 따른 의료 공백 사태가 이어지면서 발만 동동 구르는 응급환자들이 늘고 있다. 상급 대형 종합병원들이 의사가 부족해 중증 외상·응급환자들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어서다. 이런 가운데 국군수도병원 등 군 병원들이 민간인 환자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재 전국 15개 군 병원 중 응급실이 없는 함평·구리·대구병원을 제외한 12개 병원이 민간인 응급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군내 최상급 종합병원인 국군수도병원은 A 씨처럼 ‘응급실 뺑뺑이’를 돌던 환자를 수용하고, 외상센터 전문의들을 투입해 응급 수술을 시행하고 있다.
군 당국은 지난달 20일 처음으로 비상 진료체계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달 10일 낮 12시까지 군 병원을 이용한 민간인은 189명에 달한다.
사실 이번 의료 파행 사태 이전에도 군 병원은 민간인을 꾸준히 진료해 왔다. 국군외상센터는 총상 및 폭발상 등 군 특수외상 전문 진료를 위해 2022년 외상 진료 전문기관으로 문을 열었다. 지난해는 232명이 센터에서 수술 등 치료를 받았는데, 군인 및 외국 군인을 제외한 민간인이 94명이었다. 외래 진료는 불가했지만 응급실이나 외상센터는 민간인들에게 개방해 온 것. 지난해 10월에는 돌진하는 트럭에 왼쪽 다리 대퇴부 동맥과 정맥이 파열돼 다리 전체를 절단할 위기에 놓인 민간인 환자의 다리를 국군외상센터에서 살려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수액줄로 파열된 혈관을 임시로 잇는 고난도 수술을 성공적으로 시행했다. 문기호 중령은 2019년 병사에게 국내 최초로 시행해 성공한 이 수술 방법을 민간인에게도 적용해 성공시켰다.
다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부 차원에서 군 병원 개방 사실을 알리고 이용도 적극적으로 유도하면서 군 병원을 찾는 민간인이 대폭 늘었다. 국군수도병원(외상센터 포함)을 기준으로 보면 지난해 1년간 이 병원을 이용한 민간인은 200명 안팎이었는데 올해는 지난달 20일부터 20일간만 해도 89명에 달했다.
● 지난해 장기 전환 군의관 0명
이번 의료 공백 사태를 계기로 비상 진료 체계에서 군 병원 및 군의관의 역할이 주목받으면서 역설적으로 이번 기회에 군 의료 체계를 대폭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수한 장기 군의관 확보가 군 의료 역량을 끌어올릴 숙원 과제라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도 5일 국군대전병원을 찾아 “군 의료가 전우뿐만 아니라 국민의 생명도 지킬 수 있도록 충분한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현재 15개 군 병원을 비롯해 사단 의무대 등에서 근무 중인 군의관은 2400명 안팎. 이 중 2200명 이상이 38개월을 복무하는 단기 군의관이다. 최소 10년간 복무해야 하는 장기 군의관은 180명 안팎(7.6%)에 불과하다. 장기 군의관은 군 의료 체계의 숙련도를 좌우하는 중추다. 단기 군의관이 장기로 전환해 외상 수술 등에서 숙련도를 높이는 게 군 의료 발전의 핵심이지만 지난해 단기 군의관 중 장기로 지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2019년 3명, 2020년 0명, 2021년 1명, 2022명 1명으로 장기 전환하는 군의관은 매우 드물다. 현재 장기 군의관은 육군사관학교 등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민간 의대 위탁 교육을 거쳐 정부 차원에서 군의관으로 양성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장기 군의관이 턱없이 부족해 민간 의사를 전문 계약직 군무원으로 채용하고 있지만 이 역시 30여 명에 불과하다. 군 당국은 2008년 군 병원 역량 강화를 위해 전문 계약직 의사를 2013년까지 180명까지 확보한다는 계획을 수립했지만 적은 월급 등 열악한 처우 탓에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우수한 단기 군의관들이 군에 오래 남아 있도록 제대로 된 유인책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군 보건 의료에 관한 법률’은 군의관 보수를 민간 의료기관에 준하는 수준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 군의관 연봉은 국공립병원 의사의 60%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인기 과인 정형외과, 성형외과 전문의 등을 기준으로 잡으면 장기 군의관과 민간 병원 의사(국공립 제외) 간 연봉 차이는 4∼5배 수준에 달한다.
현재 장기 군의관이 받는 수당도 시간 외 수당을 제외하면 3년 초과 근무 시 지급되는 군의관 장려 수당 격인 특수업무 수당이 사실상 전부다. 근무 연수에 따라 월 55만∼88만 원이 지급된다. 진료 횟수에 따른 진료업무보조비도 지급되지만 월 최대 250만 원이다. 이 외엔 군인 계급에 따른 연봉을 똑같이 받는다.
● “군 의료 헌신, 사명감만으론 힘들어”
장기 군의관으로 근무 중인 문기호 중령 역시 처우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문 중령은 2022년 10월 지뢰 사고로 오른쪽 발뒤꿈치가 절단된 표정호 당시 병장의 발목을 17시간에 걸친 수술로 재건해 화제가 된 인물. 그는 2011년 단기 군의관으로 임관한 뒤 복무를 마치고 장기로 전환했다.
문 중령은 “군 병원에 온 환자를 수술할 때는 내가 국가를 대표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임한다”며 “의학적으로 절단이 당연한 상태인 환자 다리도 군 병원에서는 수익을 좇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일할 수 있어 살리는 것이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다만 “군 의료에 헌신하는 건 가치 있는 일이어서 젊은 시절에는 희생정신으로 버틸 수 있지만 가정이 생기고 부담이 커지면 사명감만 주장하는 게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최소한 법에 명시된 수준의 보상은 해줘야 단기 군의관 후배들에게 나와 같은 길을 걸으라고 권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덧붙였다.
국방부는 연장복무가산금 형태의 추가 수당 신설 등을 통해 단기 군의관의 장기 전환을 유도하는 방안 등 처우 개선 방안을 지난해 유관 부처와 협의했지만 실제 정책으로 반영되진 못했다. 예산 부족 문제가 매번 걸림돌이 됐다. 국방부 관계자는 “국공립병원 의사와 비슷한 처우는 해줘야 공공의료에 뜻이 있는 우수한 단기 군의관들의 선택지에 군 병원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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